소설
1년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마포의 옛 서재로 돌아오던 날의 하늘은 지독하리만큼 푸르고 높았다. 수감 생활 동안 내 갈비뼈의 상흔은 단단한 굳은살로 내려앉았고,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타인의 비명들은 비로소 고요한 정적 속으로 침잠해 있었다.
원룸 문을 열자,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아 서늘한 먼지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듀얼 모니터와 고성능 서버가 차지했던 바카라상 위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 너무나 쉽게 조작되고 삭제되던 그 디지털의 흔적들을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처분했다.
대신 방 한구석, 햇살이 가장 잘 드는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그 검은 기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학동에서 건져 올려 서은수가 내 목을 조를 각본으로 썼던, 크로바 수동 타자기.
나는 더 이상 타인의 죽음을 대필하지 않는다. 그 가짜 진실들을 세탁하며 연명하던 유령의 삶은 구치소의 차가운 철문 안에서 이미 장례를 마쳤다. 나는 타자기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자판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활자 대에 묻은 묵은 먼지가 손끝에 닿았다. 수정할 수 없고, 필터로 감출 수 없는 기록들. 그것만이 내 죄바카라감을 달래주고 내 진짜 인생을 백업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우편함에서 수거해 온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정갈하고 한 치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 그 고유한 필체만으로도 나는 그것이 누구의 서사인지 단숨에 읽어낼 수 있었다.
서은수였다.
그녀는 나보다 몇 달 먼저 출소한 뒤, 남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에 자리를 잡고 다시 고서적을 복원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편지 안에는 짧은 글귀 대신, 작은 흑백 사진 한 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비 내리는 포구, 안개 낀 바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에 괴물이었든 공범이었든, 그 순간 그곳에 진실을 찾기 위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선명한 은염(銀鹽) 입자로 종이 위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녀는 편지의 말미에 작게 한 줄의 문장을 남겨두었다.
「우리가 만든 가짜 문장들은 불타 없어졌지만, 그 행간(行間)에서 피어난 진짜 진실은 여전히 이곳에 살아 있습니다. 강우 씨, 이제 당신의 진짜 첫 줄을 쓰세요.」
은수는 나를 용서하고 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하게 용서하기도 전에, 그녀는 문장 너머에서 내게 새로운 페이지를 펼칠 용기를 건네고 있었다.
창밖으로 마포대교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기분 좋은 하얀 소음이 되어 흘러들었다. 나는 타자기의 고무 롤러 사이에 얇은 먹지 대신, 아무런 얼룩도 묻지 않은 새하얀 종이 한 장을 밀어 넣었다.
이 기계의 자획 밸브는 여전히 고장 나 있어, 글을 쓸 때마다 'ㅂ'과 'ㄹ' 뒤에 미세한 오일 자국을 남길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백도현이 비웃던 치명적인 오타(Bug)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며 글을 쓰고 있다는, 오직 나만이 남길 수 있는 정직한 삶의 흉터이자 인장(Signature)이었다.
철컥, 탕!
첫 자판을 누르자 둔탁한 금속음이 서재의 정적을 깨뜨렸다. 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반발력이 내 심장 박동과 완벽하게 공명(Resonance)했다.
나는 내가 대필했던 죽은 자들의 이름 대신, 30년 전 그 불타던 서재에서 목숨을 잃었던 내 아버지의 이름과, 진실을 위해 투신했던 서 형사의 흔적, 그리고 온전하게 살아남은 한강우라는 내 진짜 인생의 서사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그곳에는 정교하게 조작된 결말 대신... 우리가 채워나가야 할 새로운 앨범의 첫 페이지가 기다리고 있다.」
글자가 종이의 살을 파고들며 선명한 잉크 자국을 남길 때마다, 내 허파를 짓누르던 지독한 불면의 안개가 서서히 걷혀갔다. 잃어버린 시간과 죄바카라감은 더 이상 내 인생의 구멍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써 내려가야 할 서사의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 되었다.
철컥, 탕! 철컥, 탕!
규칙적인 타자 소리가 서재를 가득 채웠다. 나는 더 이상 꿈에서 비명을 지르며 깨지 않는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베끼던 '대필 작가'의 삶에 영원한 마침표를 찍었고, 이제는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진짜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다.
창밖으로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내려 타자기의 검은 바디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다음 문장을 쓰기 위해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창밖의 바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나는 이제 내 삶의 다음 페이지를 두려움 없이 펼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인생의 진짜 첫 줄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철컥.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이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문장과 문체라는 문학적 소재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인 죄바카라감과 구원, 그리고 아날로그적 집념을 서스펜스라는 틀 안에서 치밀하게 풀어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