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14장: 진실의 잉크 (The True Ink)


1. 지워진 이름들


사법(司法)의 톱니바퀴는 차갑고도 정확하게 굴러갔다. 백도현이 구축했던 오만한 각본가들의 제국은 내가 타자기로 찍어낸 아날로그 증거와 문체 분석 해시값 앞에 완전히 붕괴했다. 30년 전의 방화 살인 묵인, 수십 건의 유서 대필 및 타살 조작 혐의가 인정되어 백도현에게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아버지를 세탁하기 위해 나를 미끼로 썼던 서은수 역시 공범과 위증의 혐의로 법정 구속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마침표는, 당연하게도 나를 향해 찍혔다.


"피고인 한강우를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3년 전 서연 그룹 차남의 유서를 대필했던 나의 원죄(原罪). 판사의 방망이 소리가 법정을 울릴 때, 나는 비로소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타인의 죽음을 베끼며 벌어온 추악한 대가는 내 손목을 죄어오는 차가운 수갑의 감촉으로 돌아왔고, 그것은 내가 치러야 할 마땅한 문장 교정료였다.


포승줄에 묶여 호송차에 오르기 전, 저 멀리 피고인석의 서은수와 마지막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푸른색 수의를 입은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복수의 독기도, 가짜 연민의 행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짧게 목례를 건넸다. 우리를 묶었던 30년의 잔혹한 서사가 마침내 완벽하게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2. 독방이라는 흰 종이


남부구치소의 독방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가로세로 두 평 남짓한 시멘트 공간.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마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거대한 '하얀 인화지' 같았다.


듀얼 모니터의 푸른빛도, 나를 감시하던 백도현의 사냥개들도, 6월 15일의 살인 예고장 먹지도 더 이상 이곳에는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나를 질식시키던 그 검은 종이는 경찰의 증거물 상자 속으로 들어갔고,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통증을 남기는 갈비뼈의 상흔뿐이었다.


철컥.


철문 하단의 구멍으로 식판과 함께 교도관이 무심히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영치금으로 구매를 신청했던 낡은 재생 노트 한 권과 모나미 볼펜 한 자루였다.


나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 낡은 노트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하얀 종이 위로 독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새벽의 은은한 햇살이 번졌다. 내 손가락은 더 이상 타인의 문체를 복사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았다. 볼펜을 쥐는 내 손귀에는 기분 좋은 묵직함이 실려 있었다.


나는 내 진짜 이름, '한강우'라는 세 글자를 노트 맨 상단에 꾹 눌러 적었다. 볼펜 촉이 종이를 긁으며 내는 둔탁한 아날로그 마찰음이 고요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내가 36년 동안 잃어버렸던, 나만의 고유한 문체(文體)가 살아나는 신호탄이었다.


3. 진실의 잉크 (The True Ink)


내가 대필해 온 유서들은 모두 타인의 죽음을 세탁하는 가짜 잉크였다. 하지만 지금 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내 죄바카라감과 슬픔,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온전한 기억을 기록하는 '진실의 잉크'였다.


나는 쓰기 시작했다.


30년 전 그 불타던 서재의 바카라상 밑에서 공포에 떨던 여섯 살 아이의 눈망울부터, 타인의 죽음을 팔아 연명하던 비겁했던 청춘의 초상, 그리고 황학동에서 발견한 그 크로바 타자기가 내 인생에 던진 잔혹한 수수께끼까지. 행간과 행간 사이를 메우는 내 문장들에는 더 이상 허무주의나 냉소 같은 오타가 묻어나지 않았다. 문장은 서정적이면서도 뼈아팠고, 서늘하면서도 정직했다.


"선배, 형 소설은 언제 쓸 건데?"


후배의 옛 질문이 이제는 환청이 아닌, 내 노트 위의 생생한 활자가 되어 답변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밤 나 자신을 향해 유서를 쓰던 유령의 삶을 끝냈다. 이 감옥의 벽은 나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내 진짜 서사를 보호해 주는 안전한 장정(裝幀)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복도에 취침등이 켜졌다. 나는 노트를 덮고 가만히 벽에 기대어 누웠다. 가슴통증은 여전했지만, 허파 깊은 곳까지 차가운 밤공기가 매끄럽게 흘러들었다. 지독했던 불면의 밤은 가고, 비로소 청량한 잠이 찾아오고 있었다.


4. 마지막 페이지의 전야(前夜)


징역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내 노트의 페이지는 차곡차곡 진실로 채워져 갔다.


나는 더 이상 6월 15일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날은 내가 죽은 날이 아니라, 내 인생의 왜곡된 타임라인을 내 손으로 직접 바로잡은 '교정의 날'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트의 마지막 한 페이지를 남겨둔 채, 나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이 소설의 진짜 결말, 그리고 내 인생의 완전한 에필로그는 이 창살 너머의 세상으로 나가는 날 채워질 터였다.


창밖으로 5월의 빗소리 대신, 맑은 새벽의 참새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첫 장을 넘겼을 뿐이다."


14장의 막이 내리며, 대필 작가 한강우의 추악했던 서사는 온전한 인간 한강우의 고백록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진실의 잉크는 종이 깊숙이 스며들어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영원의 인장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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