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13장: 단 하나의 오타 (The Only Typos)


1. 잉크가 번진 법정의 뒤편


백도현의 범죄 DNA를 증명하는 문체적 지문이 법정에 폭로된 후, 재판부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30년 전의 화재 원인 조작과 대필, 그리고 최근의 살인 교사 혐의까지 엮인 그의 유죄는 이제 번복할 수 없는 사실(Fact)로 굳어지고 있었다. 선고 재판을 앞두고 법정이 잠시 휴정된 오후 4시, 사법부의 화려한 조명 뒤편에 숨은 법원 지하 주차장은 기괴할 정도로 한산했다.


나는 갈비뼈를 움켜쥔 채, 마지막 정리를 위해 서고에서 인계받은 실물 서류 봉투를 들고 지하 2층의 차량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끼이익—— 툭.


그때, 저 멀리 외진 관리실 음영 구역에서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거친 소리와 함께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랜턴의 광량을 낮춘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 백도현의 전용 리무진 차량 옆,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들이 한 여자를 강제로 차량 뒷좌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서은수였다.


그녀의 입은 청테이프로 막혀 있었고, 정갈하던 머리칼은 헝클어진 채 나를 보며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량의 열린 문틈 사이로,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으며 냉혹한 눈빛으로 지시를 내리는 백도현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법정에서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인간이 아니었다. 선고가 내려지기 전, 자신의 공범이자 모든 위조의 기초 데이터를 쥐고 있는 서은수를 현장에서 납치해 '완벽한 증거 인멸(Murder)'을 감행하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2. 완벽한 각본의 치명적인 버그


"이준호... 아니, 한강우 씨."


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자, 백도현의 수하들이 일제히 품 안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백도현은 리무진의 루프를 잡은 채, 내 수척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법정에서 내 문체를 분석해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었나 보군. 하지만 현실의 각본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오늘 이 주차장에서 서은수는 자네의 과거 대필 범죄에 대한 보복으로 자네에게 살해당하고, 자네는 도주 중 한강에 투신하는 시나리오가 내 서재의 타자기로 방금 발송되었거든. 자네가 경찰에 제출했다는 그 아날로그 서류? 자네가 죽고 나면 그것 역시 미치광이 소설가의 위조 서류로 세탁하는 건 일도 아니야."


백도현은 차 문을 닫으려 했다. 그의 사냥개들이 내 숨통을 끊기 위해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짓이겨진 갈비뼈가 다시 비명을 질렀고, 내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철저한 무력의 격차 앞에서 나는 다시 마침표를 강요받는 배역으로 전락할 위기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뇌 속의 픽셀 알고리즘이 백도현의 차량 보닛과 그가 쥐고 있던 '자살 예고장 먹지'의 잔상을 대조해 냈다. 대필 작가이자 설계자로서, 나는 그가 급하게 수정한 이 최후의 시나리오 속에서 치명적인 '오타(Error)' 하나를 발견했다.


"백 변호사님. 당신은 완벽한 자살극을 연출했다고 믿겠지만, 당신의 그 급조된 각본에는 아주 초보적인 오류가 하나 들어있습니다."


내 말에 백도현의 손길이 멈췄다.


"당신이 내 문체를 복사해 쓴 그 '최종 자살 유서'의 출력 시간... 당신은 내 위성 전화기 셧다운 시간에 맞춰 오후 3시 45분으로 박아놨더군요. 하지만 당신들은 몰랐겠지. 내 마포 서재의 크로바 타자기는 1970년대산 수동 기계라, 자획의 압력 밸브가 고장 나 있어 'ㅂ'과 'ㄹ'을 쓸 때 종이 뒷면에 미세한 미싱 오일 자국이 번진다는 사실을."


3. 행간을 뒤트는 반격


백도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자네는 여기서 죽을 텐데."


"상관이 있습니다. 내가 병원을 나서기 전, 김 과장에게 맡겨둔 내 타자기의 진짜 '인장 일람표'에는 그 오일 번짐의 해시값 수치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내 서재에서 가져간 그 위조 유서에는... 그 오일 번짐의 흔적이 전혀 없지. 당신들은 디지털 폰트로 내 문체만 베꼈을 뿐, 아날로그 기계가 가진 고유의 '흉터'까지는 복사하지 못한 겁니다."


내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주차장 천장의 대형 스피커에서 법원 내 통제실의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위이이잉——!


"경찰청에서 알립니다! 지하 2층 출구 전 차량 폐쇄하십시오! 피고인 백도현의 도주 및 납치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백도현은 몰랐다. 내가 주차장으로 내려오기 전, 그의 변호인단이 재판부에 제출했던 '소송 서류'의 출력 폰트와 내 타자기의 활자 흉터를 실시간으로 대조해 법원 보안팀의 메인 서버에 '위조 증거 감지 코드'로 이미 전송해 두었다는 사실을. 백도현이 서은수를 차에 태우는 순간, 차량의 번호판을 인식한 보안 시스템이 자동으로 락(Lock)을 걸어버린 것이다.


"이 빌어먹을 글쟁이 새끼가...!"


백도현이 이성을 잃고 소리치며 권총을 들어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푹, 푹——!


4. 지워진 페이지를 넘기며


소음기 총성이 지하 주차장의 시멘트 기둥을 때리며 불꽃을 튕겼다. 나는 바닥을 구르며 백도현의 차량 보닛 앞으로 돌진했다. 깨진 유리창 파편이 살을 찢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차 문을 발로 걷어차며, 뒷좌석에서 버둥거리던 서은수의 결박을 완전히 뜯어냈다.


"은수 씨, 내려요! 이 차는 이제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은수가 입의 테이프를 뜯어내며 비명을 질렀다. 주차장 입구를 뚫고 기획수사대 형사들이 수십 명씩 들이닥치며 백도현의 사냥개들을 바닥에 메치고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백도현은 권총을 쥔 채 자신의 리무진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사방이 경찰들의 방패와 총구로 막혀 있었다. 그의 오만한 남색 슈트는 주차장의 검은 기름때와 빗물로 더럽혀져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다 끝났습니다, 각본가 선생. 당신의 바카라에는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없거든."


나는 품 안에서 30년 전 내 아버지를 찌르고 일기장을 조작했던 서 형사의 진짜 죄악이 담긴 '납 활자 상자'를 백도현의 발밑에 툭 던졌다. 그 차가운 금속 덩어리들이 바닥을 굴러 백도현의 구두 끝에 닿았다. 그것은 그가 30년 동안 세탁해 온 진실의 최종 인화본이었다.


백도현이 허탈한 듯 권총을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는 순간, 법원 종소리가 지하까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13장의 막이 내리며, 나와 서은수, 그리고 백도현을 묶고 있던 30년의 잔혹한 대필 서사는 완벽한 사법적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들이 내 목에 걸어두었던 살인 예고장은 이제 쓰레기통 속의 파지(破紙)가 되었고,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진짜 첫 줄을 교정할 온전한 권한을 손에 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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