滄海狂風記 (창해광풍기)

수필

by산들강바람

바람이 거칠어질 때, 바다는 비로소 제 속살을 드러낸다.

평소의 바다는 얌전하다. 푸르고 반짝이며,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낯빛으로 제 몸을 감춘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오늘 동해의 푸른 물결은 온순한 낯빛을 거두고,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해안가를 때리는 파도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울림이 아니라, 거대한 대지의 포효(咆哮)와 같다. 짚신을 신고 모래톱을 걷던 옛 시인들이 느꼈을 법한 미완(未完)의 고독이, 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뺨을 사정없이 갈긴다.


바람이 이렇게 거센 날이면 해변에 사람이 드물다. 모두 유리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거나,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 서 있다. 외투 깃을 세우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에 몸을 조금 기울인 채. 거센 것 앞에 서면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오래된 본능이 발을 붙들었는지도 모른다. 물러서면 영영 모르고 지나칠 것 같아서. 이 격렬함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어서.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친다. 하얗게 부서진다. 그리고 다시 물러간다.

부서지는 것이 끝이 아니다. 파도는 부서지기 위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서지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갯바위에 흰 포말을 남기고, 자기 몸의 일부를 돌 위에 새겨놓고, 바다로 돌아간다. 그 치열한 격동(激動)의 순간이야말로, 바다가 가장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잔잔할 때의 바다는 아름답지만, 지금 이 순간의 바다는 살아있다. 아름다움과 살아있음은 때로 다른 것이다.


문득 바다를 바라보며, 삶의 거친 계절들을 떠올린다.

누구에게나 狂風(광풍)의 시절이 있다. 아무리 단단히 서 있어도 중심을 잡기 어려운 날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그 자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버텼던 시간들. 그 계절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그 말이 위로인지 합리화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오늘 이 바다 앞에 서니 그 말의 의미가 조금 달리 보인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바다는 호수와 다름없고, 시련이 없는 삶은 깊이를 더할 길이 없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수면을 뒤흔들 때에야, 저 깊은 심해(深海)의 가라앉았던 것들이 뒤집히고 깨어난다. 바닥에 고여 있던 것들이 올라오고, 섞이고, 다시 가라앉는다. 그 과정이 바다를 정화(淨化)한다. 고요한 바다가 오래 계속되면 물은 썩는다. 적당한 파도가, 적당한 바람이, 바다를 살게 한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茫茫大海) 위에서 우리 역시 수없이 많은 풍랑을 만난다. 때로는 중심을 잡기조차 힘든 강풍 속에서 돛을 내리고 숨을 죽여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몰아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서며 나아가야 할 때도 있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저 파도를 바라보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버티는 것도 항해다. 멈춘 것처럼 보여도, 파도를 견디는 동안 배는 무언가를 배운다.


오늘 눈앞에 펼쳐진 저 격렬한 바다는, 어쩌면 우리네 삶이 가진 역동성과 닮아 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를 가만히 응시한다. 파도 하나가 먼 곳에서 시작하여 이리로 오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수평선 너머에서 바람에 밀리기 시작하여, 점점 높아지고, 속도를 모으고, 마침내 이 갯바위에 와서 부서지기까지. 그 긴 여정의 끝이 부서짐이라는 것이 처음엔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보인다. 부서지는 자리가 끝이 아니라 도착이다. 파도는 부서지기 위해 그 먼 길을 왔고, 부서지는 순간 가장 크고 가장 희다.


사람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는 그 순간이, 사실은 가장 멀리까지 와닿는 순간인지도. 온전한 채로 머물렀다면 결코 닿지 못했을 자리까지.


바람이 조금 수그러든다. 파도는 여전하지만, 내 몸이 바람에 익숙해진 것인지 조금 전보다 덜 차갑다. 거친 것과 오래 함께 있으면 그것이 일상이 된다. 그것이 무감각인지, 적응인지, 아니면 어울림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지금 이 바다 앞에서 더 이상 물러서고 싶지 않다.


거친 파도 뒤에는 언제나 거짓말처럼 고요한 평온(平穩)이 찾아온다는 것을 자연은 이미 알고 있다. 오늘 이 거센 바람은 내 안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내일의 잔잔한 바다를 맞이하기 위한 필연(必然)의 서곡(序曲) 일뿐이다.


파도가 또 한 번 갯바위를 때린다. 하얗게 부서지고, 물러가고, 다시 온다.

나는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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