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빗물에 젖은 하수처리장의 흙탕물 대신, 이제 내 앞에는 차갑게 닦인 법정의 대리석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이곳은 문장이 진실로 승격되거나, 혹은 영원히 폐기되는 문학적 심판대였다.
피고인석에 앉은 백도현은 수의 대신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거대 로펌 태신의 파트너답게, 그는 구속 기소된 상태에서도 오만한 기색을 잃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수임료를 자랑하는 변호인단이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반면, 증인석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여전히 갈비뼈의 통증으로 인해 위태로웠다.
"증인 한강우 씨. 당신이 제출한 그 납 활자들과 타자기 문서들... 그것이 피고인 백도현의 범죄를 증명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이라는 '소설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아날로그 창작물 아닙니까?"
백도현 측 변호인이 비웃듯 물었다. 예상했던 공격이었다. 그들은 내가 디지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을 파고들며, 내가 제출한 실물 증거들을 '정신이 불안정한 대필 작가의 위조품'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비수는 백도현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직접 발언권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청석과 재판부를 향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과거의 서사'를 꺼내 들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증인 한강우는 이 사건의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는 3년 전, 서연 그룹 차남의 살해 현장에서 자살 유서를 대필하여 수사를 방해하고 거액을 챙긴 파렴치한 공범입니다. 여기 그가 당시 사용했던 암호화 계정의 복구 로그와 송금 내역이 있습니다."
법정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서은수가 백도현에게 넘겨주었던 내 과거의 기록들이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백도현은 내 도덕성을 완전히 말살함으로써 내 증언의 가치를 잉크가 번진 종이 조각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증인석 옆에 앉아 있던 서은수가 나를 차갑게 응시했다. 그녀 역시 피고인석에 있었지만, 그녀는 백도현과 형량을 협상한 듯 보였다. 그녀의 배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한강우 씨, 당신은 타인의 죽음을 팔아 돈을 벌던 괴물이었어요. 그런 당신이 정의를 논할 자격이 있나요?"
은수의 목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찢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선 기분이었다. 백도현이라는 거대한 악을 무너뜨리려던 나는, 도리어 내가 그동안 대필해 온 수많은 거짓 문장의 늪 속에 발이 묶여 버린 꼴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뇌 속의 픽셀들이 다시 정렬되기 시작했다. 백도현이 내 과거를 폭로하며 나를 압박하는 이 순간조차, 그는 자신의 '각본가적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저는 괴물이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법정의 마이크를 타고 낮게 울려 퍼졌다.
"저는 3년 전 서연 그룹 차남의 유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당신이 준 추악한 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백 변호사님, 당신이 제출한 그 로그 기록 속에... 당신은 차마 지우지 못한 당신만의 '인장'을 또 남겨두었더군요."
나는 법정 대형 스크린에 백도현이 제출한 내 범죄 로그를 띄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데이터의 행간 속에 숨겨진, 오직 대필 작가만이 읽어낼 수 있는 미세한 규칙을 지목했다.
"이 로그의 데이터 전송 방식, 그리고 제가 3년 전 유서를 작성할 때 당신이 가이드라인으로 주었던 그 문장들의 배열 구조... 그것은 30년 전 서연 그룹 화재 현장에서 당신과 서 형사가 함께 모의했던 그 '위조의 공식'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당신은 나를 공범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당신이 이 모든 사건의 '최초 설계자'였음을 증명하는 메타데이터를 내 범죄 기록 속에 박제해 둔 겁니다."
백도현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처음으로 가늘게 떨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마지막 무기를 꺼냈다. 그것은 로펌 서고에서 가져온 백도현의 진짜 연습장과, 내가 파주의 인쇄소에서 건져 올린 납 활자를 종이에 직접 찍어낸 '비교 대조표'였다.
"문장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남긴 '문체적 지문'은 지울 수 없습니다. 여기 30년 전 일기장의 오타와, 3년 전 당신이 내게 보낸 지시서, 그리고 오늘 당신이 제출한 이 소송 서류들... 이 모든 문장의 행간에는 '金'과 '錢'을 구분하지 못하는 당신만의 뒤틀린 욕망이 동일한 빈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백도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백 변호사님. 당신은 나를 지워버리려 했지만, 당신이 나를 사용해 쓴 그 수많은 가짜 유서들이 이제는 당신의 목을 죄는 증거의 사슬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당신이 찍으려 했던 내 삶의 마침표... 그것은 당신의 범죄 서사를 끝맺는 최종 교정 부호가 될 것입니다."
검찰 측에서 내가 제시한 문체 분석 결과와 백도현의 개인 비자금 흐름이 일치한다는 새로운 수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백도현의 변호인단이 소란스럽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미 승부의 저울추는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증인석에서 내려오며, 피고인석의 서은수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은수 씨. 우리 둘 다 유죄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인화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자신의 거짓부터 태워버려야 했습니다."
12장의 막이 내리는 순간, 법정의 엄숙한 정적 속에서 각본가의 권위는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내 원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 원죄를 증거 삼아 거대 악의 심장에 지워지지 않는 마침표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추악한 서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힐 우리들의 형량, 그리고 비로소 시작될 '진짜 나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