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오후의 볕이 길게 늘어지던 작업장 한구석, 먼지를 털어내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서 자재를 나르던 새파란 젊은 친구 녀석이 땀을 훔치며 이쪽을 향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영감님, 여기 남은 철근은 어디로 옮겨둘까요?"
영감님.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사방에서 울리는 거친 기계음 속에서도 그 세 글자는 유독 고막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가 부를 만한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벼락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힌 그 호칭을 가만히 되씹어보며, 나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올해로 오십 줄에 들어선 나이. 거울 속에는 이마에 깊은 골이 패고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제법 자리를 잡은 중년의 사내가 서 있지만, 스스로 한 번도 내 삶에 '영감'이라는 단어를 들여놓은 적은 없었다. 마음은 여전히 푸른 바다를 가르던 청춘의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데, 세상의 시선은 어느새 나를 저만치 앞서 보낸 노인네 취급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월이라는 놈이 던진 짓궂은 부메랑을 정면으로 맞아버린 듯한, 묘하고도 씁쓸한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인과응보(因果應報) 요, 세월의 순리다. 내게도 모든 것이 서툴지만 두려울 것 또한 없던 30대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비친 오십 대의 선배들은 그야말로 '다 산 어른'이자 세상만사에 달관한 노인네처럼 보였다. 현장의 흐름을 척척 읽어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몸짓이 둔해 보이던 그 어른들을 향해, 나는 짐짓 친근함을 가장한 청춘의 호기로 "영감, 영감" 하며 슬쩍 짓궂은 농을 던지곤 했다.
그때 대선배들이 흘려보내던 허허실실 한 웃음의 의미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너도 내 나이 돼 봐라"라던 그 말줄임표 속에 얼마나 많은 땀방울과 묵직한 삶의 무게가 숨어 있었는지, 서른의 가벼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그 세월의 강을 고스란히 건너와 그 시절 선배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젊은 아이들이 나를 향해 똑같이 "영감"이라 부른다. 야속하다거나 괘씸하다는 생각보다 먼저, 지나간 내 젊은 날의 오만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가만히 저려왔다.
사실 한자 뜻 그대로만 풀자면 '영감(令監)'은 고맙고도 과분한 이름이다. 조선 왕조의 서슬 퍼런 관직 체계에서 영감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호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같은 정1품부터 종 2품의 정승판서들이 임금과 머리를 맞댄다 하여 '대감(大監)'이라 불렸다면, 그 바로 아래 계단인 정 3품 당상관부터 종 3품에 이르는 종친과 고위 관료들을 지칭하던 엄숙하고도 높은 존칭이 바로 '영감'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법원장이나 검사장, 혹은 부처의 국장급 이상 되는 어른들에게나 붙이던 대단한 대접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현대의 일터에서 쓰이는 영감이라는 말은 그 속내가 사뭇 다르다. 좋게 말해 영감이지,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뉘앙스가 숨어 있다. "이제는 현역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다", "생각과 몸이 둔해져 제 역할을 못 한다"는 은근한 눈치와 조롱이 섞여 있는 까닭이다. 좋은 자리에 앉아 품위는 잡고 있을지언정, 정작 날카롭고 빠르게 일을 해내지는 못하는 '뒷방 늙은이'에 대한 가벼운 비하가 그 짧은 세 글자 안에 들어차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삶의 속도'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떻게 해야 다치지 않고 이 거친 현장에서 롱런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겉만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속이 단단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지 연륜으로 체득한 완급조절인 것이다. 속도는 느릴지언정 내가 다져놓은 바닥은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내가 세운 기둥은 어떠한 하중도 묵묵히 견뎌낸다.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의 이면과,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긴 것도 바로 이 '영감'의 나이가 되어서다. 그러니 아이들이 던진 "영감"이라는 말속의 뼈를 굳이 아프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거친 농담 속에서, 나는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버텨왔다는 묘한 자부심을 느낀다. 진짜 조선의 대신들처럼, 삶의 온갖 풍파와 모진 비바람을 묵묵히 이겨내고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다는 증거가 바로 그 이름이기 때문이다.
'녀석아, 너도 조만간 네가 던진 그 부메랑을 맞게 될 게다. 그때가 되면 너도 지금 내 마음을 알겠지.'
영감이라는 말은 어쩌면 세월이 내게 준 가장 정직한 '훈장'일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내 인생이라는 대지 위에 단단한 골조를 세우기 위해 청춘을 아낌없이 갈아 넣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이름. 비록 그 안에 "이제는 느려졌다"는 야속한 뜻이 섞여 있을지라도, 그 느림이야말로 세상을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진짜 지혜임을 나는 안다.
터덜터덜 현장을 빠져나오며, 어둠이 내리는 도심의 화려한 불빛들을 바라본다. 저 화려한 빌딩 숲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외벽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묵묵히 하중을 견디고 있는 콘크리트 기둥들이다. 오늘 하루도 묵묵히 내 몫의 기둥을 세우고 돌아가는 길. 아이들의 철없는 농담쯤은 허허 웃으며 넘겨버릴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생겼으니, 이 또한 영감이 되어서 얻은 참 좋은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내일도 나는 현장의 차가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며, 영감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단단한 삶을 계속해서 써 내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