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026년 6월 15일 밤 11시. 내 서재의 수동 타자기 속, 그 바스러질 듯한 검은 먹지가 예언했던 심판의 날이 마침내 도래했다. 한강 대교 남단 하수처리장의 하늘은 잉크를 쏟아부은 듯 시커멓게 뒤틀려 있었고, 양동이로 퍼붓는 듯한 폭우는 콘크리트 바닥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거센 빗줄기가 내 환자복 위에 걸친 점퍼를 무겁게 적셨지만,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내 감각은 칼날처럼 서 있었다.
철벅, 철벅——
진흙탕을 밟으며 하수처리장 중앙의 거대한 배수관 광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굴절되어 기괴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잔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광장의 중심,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라이트를 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닛 위에는 서은수가 노란 우비를 입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서 있었고, 운전석 문이 열리며 남색 슈트 위로 투명한 우비를 걸친 백도현 변호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 11시로군, 강우 씨. 자네 유서에 적힌 시간을 단 1분도 어기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역시 자네는 내 각본의 가장 충실한 배역이야."
백도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비릿하게 웃었다. 옆에 선 서은수 역시 가죽 가방을 움켜쥔 채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 변호사님, 그리고 서은수 씨. 당신들이 짜놓은 결말을 완성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이 추악한 각본의 진짜 '첫 줄'을 교정하러 왔지."
나는 품 안에서 타자기로 타이핑한 최종 교정본 서류와 함께, 내 목숨줄인 납 활자 상자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백도현이 방아쇠를 당기려 손가락에 힘을 주려는 찰나, 내 귀를 찢는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하수처리장의 철제 구조물을 강타했다.
쿠르릉—— 쾅!
하얀 섬광이 내 망막을 때리는 것과 동시에, 내 뇌의 가장 깊은 곳, 최유진 박사의 약물과 백도현의 압박으로 인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신경 세포들이 일제히 발화(發火)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억눌렸던 기억의 댐이 무너지며, 지워졌던 30년 전의 픽셀들이 제자리를 찾아 거대하게 역류해 왔다.
"아아악!"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진흙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며, 내 나이 여섯 살 때의 기억이 폭발하듯 재생되었다.
30년 전, 서연 그룹 강 회장의 저택에 불이 나던 그 밤.
나는 그 불타는 서재의 바카라상 밑에 숨어 있었다. 당시 내 아버지는 강 회장의 개인 비서이자, 그의 비자금 장부를 관리하던 대필가였다. 그리고 그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불을 지른 뒤, 아버지가 쓴 것처럼 자살 유서를 대필했던 진짜 범인.
그는 초임 검사 백도현이 아니었다. 백도현의 뒤에서 칼을 쥐어주었던 진짜 배후, 바로 서 형사... 서은수의 아버지였다.
"기억... 기억났어."
내가 피눈물이 고인 눈으로 서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 씨... 당신 아버지는 피해자가 아니야. 내 아버지를 죽이고 강 회장의 일기장을 위조했던 진짜 악마였어. 백도현은 그 죄를 묵인해 주는 대가로 서연 그룹의 돈을 챙겼던 공범이었고!"
나의 외침에 폭우 속의 정적이 깨졌다. 서은수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입 닥쳐, 한강우! 내 아버지는 정의로운 경찰이었어! 백도현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거라고!"
"아니, 당신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나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뇌 속의 완벽한 백업 데이터가 완성되자, 내 목소리에는 서늘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당신 아버지가 남겼다던 그 카세트테이프, 백도현이 유서를 대신 써주겠다고 협박하던 그 목소리... 그건 백도현이 은수의 아버지를 협박한 게 아니었어. 두 공범이 내 아버지를 죽인 뒤, 서로의 지분을 나누며 남긴 ' 범죄 모의 기록'이었지. 당신은 아버지의 명예를 세탁하기 위해, 내 머릿속의 기억을 지우고 나를 자살자로 만들어 이 사건의 완벽한 마침표로 쓰려 했던 거야!"
백도현이 허탈한 듯 실소를 터뜨렸다.
"은수 씨, 내가 말하지 않았나. 한강우의 뇌는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이라고. 30년 전 자네 아비가 저지른 위조의 버릇까지 저놈의 뇌는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서은수는 미치광이처럼 가방에서 커터칼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정체는 피해자의 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남긴 추악한 유산을 지키기 위해, 목격자인 나를 지워버리려 했던 '세 번째 각본가'였다.
"이제 다 끝났어, 한강우. 자네가 모든 걸 기억해 냈으니 더더욱 여기서 죽어줘야겠네."
백도현이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내 가슴을 향해 조준점을 맞추었다. 레이저의 붉은 점이 내 젖은 점퍼 위에서 기괴하게 번뜩였다.
"쏘세요, 백 변호사님."
나는 피를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웹 디자이너이자 대필 작가인 저는 말이죠. 언제나 원본의 '백업'을 만듭니다. 당신들이 내 계정을 동결하고 노트북을 부쉈을 때, 내가 크로바 타자기로 찍어내던 그 하얀 종이들... 기억하십니까?"
나는 품 안에서 빗물에 젖은 서류를 백도현의 발밑으로 던졌다.
"내가 타자기로 타이핑한 문장들의 자획 속에는, 서은수 씨가 내 노트북을 해킹할 때 사용했던 IP 주소와, 백 변호사님이 로펌 서고에서 출력했던 대필 로그의 해시값이 아날로그 활자의 형태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류의 사본은... 10분 전, 내가 병원을 나서기 전 김 과장을 통해 서울경찰청 본청 수사팀에 실물로 접수되었습니다."
그때였다. 하수처리장 입구의 어둠을 뚫고, 수십 대의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폭음처럼 터져 나왔다. 푸르고 붉은 불빛들이 빗줄기를 난도질하며 대지를 포위해 왔다. 백도현이 감시하던 디지털 네트워크를 우회하여, 내가 직접 찍어낸 아날로그 유서(증거)가 저들의 제국에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Bug)를 일으킨 것이다.
"반장님! 전원 투항하랍니다! 본청 기획수사대입니다!"
백도현의 수하들이 무전기를 떨어뜨리며 당황해 소리쳤다. 백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고, 서은수의 손에 들린 커터칼이 빗물 속으로 툭 떨어졌다.
[00:00]
내 머릿속의 살인 예고장 카운트다운이 마침내 종료되었다. 2막의 클라이맥스, 나는 내 뇌 속에서 폭발한 진짜 기억을 무기 삼아, 나를 죽이려던 두 명의 각본가를 내가 직접 설계한 잔혹한 문장의 감옥 속에 완벽하게 가두는 데 성공했다.
나는 품 안의 납 활자 상자를 꼭 쥔 채, 쏟아지는 사이렌 불빛 속으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내 생의 가장 어두웠던 72시간의 블랙아웃은 끝났고, 이제 저 악마들과 나 자신의 죄악을 심판할 제3막: 절정/결말의 페이지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