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10장: 숨 막히는 추격 (Suffocation)


1. 호흡의 한계선


지하 주차장의 비상구를 빠져나와 마포의 서재로 돌아가는 길은, 내 생애 가장 길고 잔인한 행간(行間)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렸고, 부러진 갈비뼈 틈새로 파고드는 통증은 이제 폐부를 직접 찌르는 날카로운 메스가 되어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비릿한 피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Suffocation.'


백도현과 서은수, 두 명의 각본가가 짜놓은 그물망은 단순히 내 뒤를 쫓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가상과 현실의 모든 산소 구멍을 정교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원룸 서재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지만, 세상은 이미 나를 향해 모든 문을 잠가버린 뒤였다. 백도현의 로펌 태신이 움직인 결과였다. 내 메인 뱅킹 앱은 '명의 도용 의혹'으로 동결되었고, 대필 의뢰를 받던 암호화 메일 계정은 접근이 차단되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이미 슬롯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카라상 위에 놓인 크로바 수동 타자기를 바라보았다. 서은수가 나를 이 지옥 같은 연극의 주연으로 캐스팅하기 위해 황학동에 떨어뜨려 놓았던 검은 기계.


"처음부터... 모든 문장이 각본대로였군."


실소(失笑)가 터져 나왔다. 내가 정의감에 불타 백도현의 오타를 추적하던 순간도, 서은수의 서글픈 눈망울에 연민을 느끼던 순간도, 모두 그녀가 정교하게 대필해 둔 감정의 지시문(指示文)을 충실히 이행한 것에 불과했다. 나는 작가를 자처했으나, 결국 두 악마가 합작해 만든 잔혹 서사의 가장 멍청한 플롯 단서로 소모되고 있었다.


2. 독백하는 유령


남은 시간은 이제 보름 남짓. 주머니 속의 검은 먹지는 여전히 6월 15일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내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에서 도망치며 중단된 진통제의 약 기운이 완전히 떨어지자, 극심한 금단 증상과 고열이 내 시야를 흐려놓기 시작했다.


방 안의 사방 벽면이 서서히 좁혀지며 나를 압사시키려는 듯한 환각이 밀려왔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푸르게 번뜩이다가 이내 녹색의 활자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인지 과부하(Cognitive Overload). 타인의 유서를 대필하며 내 뇌에 누적되었던 죽은 자들의 문장 부호들이, 일제히 깨어나 내 목을 죄어오는 끔찍한 환청이 들렸다.


"형은 왜 맨날 남의 죽음만 써?"


"너도 결국 우리와 같은 괴물이야."


나는 바닥을 기며 서랍을 뒤져 마른침과 함께 신경안정제 남은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지독하리만큼 수척했고, 눈동자는 핏발이 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유령 같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이용한 서은수도, 내 목숨을 노리는 백도현도, 그리고 과거의 탐욕으로 대필 범죄에 가담했던 나 자신조차도 신뢰의 범주 바깥에 있었다. 철저한 고립. 하지만 그 완벽한 절망의 심연 속에서, 오히려 내 대필 작가로서의 차가운 이성이 가장 날카롭게 제련(製鍊)되기 시작했다.


"각본이 완벽할수록... 도리어 사소한 버그에 무너지는 법이지."


나는 주머니에서 로펌 서고에서 목숨을 걸고 빼내 온 백도현의 이름 활자 두 개와, 인쇄소에서 건져 올린 상자를 바카라상 위에 쏟아놓았다. 내 손 안에는 이제 30년 전 백도현의 범죄를 완벽하게 증명할 '금속 활자의 문장'이 들려 있었다.


3. 지옥의 이중주(Duet)


그때, 먹통이 되었던 내 구형 위성 전화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진동했다. 백도현의 번호였다. 전화를 받자, 그의 잔인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또 다른 익숙한 호흡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강우 씨, 6월 15일 한강 하수처리장 시나리오의 인쇄 대기 설정이 끝났네. 자네가 서은수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각본을 조금 수정했지. 배신당한 자의 처절한 치정 자살극... 꽤 흥미로운 마무리가 되지 않겠나?"


수화기 너머로 서은수의 낮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강우 씨, 제 각본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의 그 완벽한 문체가 백도현과 함께 타오를 때, 내 복수도 비로소 인화(印畵)될 테니까."


두 명의 각본가가 내 목에 단두대의 칼날을 걸어두고 이중주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짠 플롯이 완벽하다고 믿고 있었고, 내가 이 서사 속에서 무력하게 마침표를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백 변호사님, 그리고 서은수 씨."


나는 타자기의 자판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고열로 타오르는 숨을 내뱉었다.


"당신들이 간과한 게 하나 있어. 위조의 대가들은 완벽한 각본을 짜는 데 집착하지만, 정작 현실이라는 종이 위에 찍혀 나올 '단 하나의 오타'는 통제하지 못하지. 당신들이 짜놓은 그 완벽한 6월 15일의 페이지... 내가 직접 교정(校正) 해 주겠어."


4. 최종 교정 시나리오 (The Final Edit)


전화를 끊은 나는 타자기 앞에 하얀 인화지를 밀어 넣었다.


백도현과 서은수가 나를 6월 15일의 약속 장소로 끌어내기 위해 인질극과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면, 나는 도망치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그 지옥의 한복판으로 직접 걸어 들어갈 각본을 역으로 작성해야 했다.


그들이 내 죽음의 유서를 대필했다면,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방식으로 그 유서의 행간 속에 백도현의 30년 전 범죄 활자(해시값)와 서은수의 공모 로그를 동시에 증명할 '디버깅 소스코드'를 문장의 형태로 심기 시작했다.


철컥, 탕! 철컥, 탕!


서재 안에서 크로바 타자기의 둔탁한 금속음이 새벽의 정적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손가락 끝이 깨져 하얀 종이 위로 붉은 핏방울이 번졌지만, 나는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문장 부호의 간격, 숨겨진 쉼표의 위치, 한문 병기의 독특한 대칭 구조 속에 저들의 파멸을 유도할 치명적인 오타(Bug)들이 정교하게 인쇄되어 갔다.


내 허파를 조여오던 그 지독한 질식감(Suffocation)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잔혹한 복수의 서사적 열망이 가득 차올랐다.


이장이, 막 내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저들의 각본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배역이 아니었다. 나는 내 피와 살을 갈아 넣어, 진범들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릴 '최종 교정본'의 첫 줄을 완성해 내고 있었다. 6월 15일, 한강 하수처리장. 그곳은 내가 죽는 무덤이 아니라, 거대 악들의 제국이 완벽하게 침몰할 심판의 대지가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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