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흘리는 것들

수필

by산들강바람

해변에 혼자 섰다.

사람들은 저 멀리서 각자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연인은 나란히 어깨를 붙이고, 아이는 파도를 향해 달려갔다가 다시 달려오고, 노인은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수평선 어딘가를 오래 바라본다. 모두 같은 바다 앞에 서 있지만, 저마다 다른 바다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 수만큼 바다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풍경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혼자 바라보고 있다.

혼자라는 것이 외롭지 않다. 오히려 이상하게 충만하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온다. 철썩, 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고, 찰랑, 이라고 하기엔 너무 의젓한 소리로 파도는 모래 위를 미끄러진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모래를 조금씩 데려간다. 흘리는 것인지, 가져가는 것인지 모를 동작으로 파도는 매번 왔다가 매번 간다. 모래는 그것을 안다는 듯, 저항하지 않는다. 그냥 흘려보낸다. 파도가 물러간 자리엔 작고 반짝이는 물기가 남고, 그것도 곧 햇살에 스며든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본다.

바다 앞에 서면 누구나 잠시 멈추게 된다. 그것은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다는 끝이 없다. 수평선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눈의 한계일 뿐, 그 너머로도 바다는 계속된다. 끝없는 것 앞에 서면 사람은 자신의 크기를 새삼 느낀다. 작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반드시 슬픈 일은 아니다. 오히려 가볍다. 그동안 무겁게 붙들고 있던 것들이 파도 소리에 조금씩 씻기는 느낌이랄까.

파도가 또 온다. 찰랑, 찰랑. 모래 위를 얇게 번지다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돌아간다.

저 멀리 아이 하나가 파도를 향해 달려가다가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자 깔깔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파도를 이긴 것처럼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지만, 파도는 아무것도 지지 않았다. 그냥 왔다가 갔을 뿐이다. 이기고 지는 것과 무관하게, 파도는 계속 온다. 아이는 그것도 모른 채 다시 달려간다. 그리고 또 깔깔거린다. 아마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 모른다.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달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일 테니.

나는 물가에 가까이 서지 않았다. 파도가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 그러나 파도 소리는 충분히 들리는 자리.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이 좋다. 완전히 들어가지도 않고,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 자리. 인생의 많은 순간이 그런 경계에 있었던 것도 같다. 뛰어들어야 하는지, 물러서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날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보니, 경계에 서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도망이 아니라, 그냥 거기 있기를 선택한 것.

해가 조금씩 기운다. 바다 빛이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 파랗던 것이 은빛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물 위에 금빛이 번진다. 파도는 여전히 찰랑찰랑, 모래를 흘리고 있다. 조금씩, 쉬지 않고. 바다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그러나 한 번도 같은 모양으로 오지 않는다. 어제의 파도와 오늘의 파도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같은 물이 아니다.

사람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그 사이 얼마나 많은 것이 흘러갔는지. 파도가 모래를 조금씩 가져가듯, 시간은 내게서 무언가를 조금씩 가져갔을 것이고, 동시에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무언가를 두고 갔을 것이다.

저 멀리 사람들이 여전히 각자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사람들과 바다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바다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이상하게도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저마다의 무게로, 저마다의 사연으로 이 거대한 것 앞에 서 있는 사람들. 바다는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왜 왔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그냥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각자 알아서 위로를 받거나, 쓸쓸해하거나, 아무 생각도 안 하거나 한다.

파도가 또 한 번 모래를 흘린다. 찰랑.

나도 언젠가는 저 멀리 있는 사람들처럼 누군가의 풍경 속 한 점이 되어 있겠지. 혼자 해변에 서서 오래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다른 누군가의 눈 끝에 잠깐 머물렀다가 지워지겠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파도가 모래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돌아가는 것처럼, 나도 이 자리에 잠깐 서 있다가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파도는, 내가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올 것이다.

찰랑, 찰랑.

필요하시면 특정 단락 손보거나 제목 바꿔드릴게요.

작가의 이전글『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