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9장: 배신의 그림자 (Shadow of Betrayal)


1. 어둠 속의 오타(Error)


소음기가 장착된 백도현의 권총이 내 이마를 겨누고 있던 그 순간, 서고를 지배하던 것은 인간의 호흡소리가 아니라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계음뿐이었다. 화면 속 녹색 활자들은 이미 한 달 뒤 내 죽음을 기정사실화한 채 무자비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문장이라도 있나, 강우 씨? 자네 문체라면 내가 아주 정갈하게 복사해 줄 수 있네만."


백도현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찰나였다.


콰르릉—— 툭.


예상치 못한 균열이 각본가의 성소를 강타했다. 서고 전체의 전원이 거짓말처럼 일시적으로 차단된 것이다. 7장에서 내가 파주의 폐인쇄소에 심어두었던 타이머 로직—백도현의 개인 서버와 연동된 원격 백업 시스템이 활자 상자의 오타 해시값을 감지하고 메인 프레임을 강제로 셧다운(Shutdown)시킨 결과였다.


사방이 잉크를 쏟아부은 듯한 암흑 속에 잠겼다.


"이 무슨...!"


백도현이 당황해 외치는 소리와 함께 소음기 총성이 어둠을 찢었다. 푹, 푹. 불꽃이 튀는 찰나의 시야를 이용해 나는 바닥을 기어 서은수가 묶여 있는 의자로 돌진했다. 주머니에서 7장의 그 핀셋을 꺼내 그녀의 손목을 결박한 케이블 타이를 거칠게 뜯어냈다.


"은수 씨, 일어나요! 지금 나가야 합니다!"


전신을 짓누르는 갈비뼈의 통증을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나는 은수의 손을 잡고 비상 유도등의 희미한 초록빛을 따라 달렸다. 서고의 육중한 유리문은 정전으로 인해 자동 잠금이 풀려 있었다. 뒤에서 백도현의 부하들이 손전등을 켜고 우리를 추격하는 불빛들이 서가 사이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우리는 비상계단을 통해 태신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미치광이처럼 굴러 내려갔다.


2. 붉은 잉크의 고백


지하 4층, 백도현의 감시망이 미처 닿지 않은 도색 구역의 어두운 틈새로 숨어 들어서야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내 손바닥 안에는 로펌 서고에서 목숨을 걸고 훔쳐낸 백도현의 이름 활자, ‘도(道)’와 ‘현(賢)’이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채 쥐어져 있었다.


"은수 씨, 괜찮습니까? 다친 데는..."


내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 랜턴을 비춘 순간, 내 손길이 허공에서 멈췄다.


의자에 묶여 백도현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던 피해자치고는, 서은수의 눈빛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녀의 정장 소매 깃 사이로 살짝 드러난 손목에는 케이블 타이에 묶였던 자국이나 멍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필 작가로서 인간의 미세한 거짓말과 태도를 교정하던 내 관찰안이, 그녀의 몸에 새겨진 치명적인 '오타'를 포착해 낸 것이다.


"은수 씨... 당신 백도현의 서고 마스터키카드가 어디 있는지, 그리고 일기장의 진짜 비밀을 어떻게 그토록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겁니까?"


내 서늘한 질문에 지하 주차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예전의 조용한 고서적 복원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서글프고도 냉혹한 미소가 번졌다.


"한강우 씨. 당신은 참 뛰어난 작가예요. 문장 속의 악마는 잘 찾아내면서, 왜 정작 당신 눈앞에 있는 인간의 행간은 읽지 못하나요?"


그녀가 가죽 가방에서 꺼낸 것은 30년 전 서 형사가 남겼다던 그 카세트테이프의 '원본 케이스'였다. 그 케이스 뒷면에는 소유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태신 법률사무소 소속 조사원: 서은수]


3. 공범들의 서사


"당신... 백도현의 직원이었어?"


"내 아버지가 백도현에게 살해당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난 그 복수를 위해 지난 5년간 백도현의 가장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살았어요. 그 자가 조작해 온 그 수많은 유서들의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고 복원해 준 게 바로 나니까."


추악한 진실이 껍질을 벗었다. 서은수는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백도현의 제국 안에서 가짜 각본의 밑그림을 그려주던 또 다른 대필가이자, 공범이었다.


"백도현은 내 손으로 무너뜨려야 했어요. 하지만 그 자의 의심을 피하면서 그 비밀 서고를 열기 위해서는, 완벽한 '미끼'가 필요했죠. 그게 바로 당신이었어요, 한강우 씨."


그녀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건조했다.


새벽에 내 노트북으로 날아왔던 그 의문의 의뢰 메일, 황학동 골동품점에 크로바 타자기를 가져다 놓아 내가 사게 만든 일, 그리고 내 문체를 분석해 '살인 예고장 먹지'를 정교하게 위조해 타자기 속에 심어둔 진짜 각본가.


그것은 백도현이 아니었다.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서은수였다.


"당신이 자살 예고장을 보고 미쳐 날뛰며 백도현의 오타를 추적해야만, 백도현도 자네를 제거하기 위해 진짜 일기장의 숨겨진 비밀들을 수면 위로 올릴 테니까요. 당신의 그 결벽증적인 정의감과 천재성이, 내 복수극의 가장 훌륭한 소모품이었던 셈이죠."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내가 지키려고 했던 진실, 내가 구하려고 했던 여인. 그 모든 서사가 사실은 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 위해 서은수가 정교하게 대필해 놓은 가짜 시나리오였다. 이 세상에 내가 믿을 수 있는 문장은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았다.


4. 지워진 신뢰의 마침표


"그럼 6월 15일 한강 하수처리장에서 내가 죽는다는 그 유서도... 당신이 장난쳐 놓은 각본이라는 건가?"


"아니요, 그건 진심이에요."


서은수가 내 품에 안긴 납 활자 상자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백도현이 무너지면, 그자와 연결된 대필 로그를 가진 당신도 같이 사라져야 해요. 그래야 내 복수가 완벽하게 세탁되니까요. 한강우 씨, 당신은 3년 전 서연 그룹 차남의 유서를 대필해 준 순간부터 이미 죽었어야 할 유령이었어요. 원망하려면... 타인의 죽음으로 돈을 벌던 당신의 그 손가락을 원망하세요."


멀리서 주차장 차단기가 열리며 백도현의 수하들이 타이어 굉음을 내며 지하 4층으로 밀고 내려오는 불빛들이 보였다. 서은수는 내게서 서서히 멀어지며, 백도현의 차량이 서 있는 밝은 조명 아래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다시 완벽한 '인질'의 표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강우 씨, 도망쳐요. 6월 15일까지 각본을 완성해 오지 않으면, 우린 둘 다 죽어요!"


그녀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지르는 비명은, 이제 내 귀에는 지독한 위선이자 완벽하게 연출된 대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남겨졌다. 손에 쥔 백도현의 납 활자들은 지독하게 무거웠고, 내 심장은 배신의 칼날에 난도질당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진실을 찾기 위해 걸어온 길의 끝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적의 총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역자의 비수였다. 2막의 절정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나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완벽한 고립(Isolation)의 감옥에 갇힌 채, 나만의 잔혹한 마지막 페이지를 준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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