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콰아아아 앙——!
에탄올과 정착액 드럼통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폐인쇄소의 지붕을 뜯어냈다. 등 뒤에서 몰아치는 열풍이 내 몸을 공터의 진흙탕 위로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와중에도, 나는 품에 안은 납 활자 상자를 필사적으로 감싸 안았다. 짓이겨진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배어 나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불길을 피해 어둠이 자욱한 잡초 숲으로 기어들어 갔다.
뒤를 돌아보니 백도현의 수하들이 불타는 건물 안에서 당황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거센 불길이 그들의 포위망을 일시적으로 끊어놓은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근처 버려진 비닐하우스 음영 속으로 숨어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철제 상자를 열었다. 랜턴 불빛 아래, 납 활자들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자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맞추던 내 손가락이 한 지점에서 굳어버렸다.
"없어... 왜 없지?"
백도현의 혐의를 입증할 가장 결정적인 단어, 그의 이름 석 자 중 ‘도(道)’와 ‘현(賢)’의 납 활자가 들어갈 칸이 텅 비어 있었다. 방금 전 폭발의 충격으로 윤전기 하부의 진흙 바닥 어딘가로 튕겨 나간 것이 분명했다.
주춧돌이 빠진 문장은 힘을 잃는다. ‘검사 백○○이 화재 원인을 조작했다’라는 불완전한 문장으로는 그 거대한 각본가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법정은 주어가 흐릿한 텍스트를 진실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백도현이 지우지 못한 아날로그의 증거를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서사는 다시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20여 일. 주머니 속의 살인 예고장 먹지는 여전히 내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서늘한 카운트다운을 새겨 넣고 있었다.
유실된 활자를 다시 찾으러 불타는 인쇄소로 돌아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백도현이 자신의 완벽한 범죄를 기념하기 위해, 혹은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보관하고 있을 ‘그의 또 다른 서고’를 터는 것.
나는 서은수가 납치되기 전 김 과장에게 남겼던 또 다른 메모를 기억해 냈다.
「백도현은 자신이 조작에 성공한 진짜 원본 유서들과 가짜 각본들을 대형 로펌 ‘태신’의 개인 파트너 서고에 보관한다. 그곳은 대한민국 검찰조차 함부로 압수수색하지 못하는 법적 성소(聖所)다.」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디지털 방화벽을 뚫을 수 없다면, 나는 대필 작가로서의 내 신분을 이용해 그 성소의 심장부로 직접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다음 날 오후, 나는 진통제를 치사량 직전까지 입에 털어 넣은 뒤 정장을 차려입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수척했지만, 눈빛만큼은 잉크를 가득 머금은 만년필 촉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다. 서초동에 위치한 로펌 태신의 빌딩은 거대한 유리 요새 같았다.
"백도현 변호사님 전용 서고의 도서 분류 체계 개편 건으로 온 한강우 작가입니다. 백 변호사님께서 직접 승인하신 건입니다."
나는 4장에서 백도현이 내게 던졌던 대필 의뢰서와 그의 위조된 서명이 담긴 출입증을 안내 데스크에 제시했다. 타인의 필체를 복사하는 내 능력이, 이번에는 그의 친필 서명을 위조하는 범죄적 무기가 되었다. 안내원은 컴퓨터 화면의 스케줄러와 서명을 대조해 보더니, 아무런 의심 없이 마스터 키카드를 건넸다.
"21층 전용 서고입니다. 변호사님 지시로 출입 보안이 강화되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엘리베이터가 소리 없이 상승할 때마다 내 심장 소리가 벽면을 울리는 것 같았다. 21층의 문이 열리자, 바닥 전체에 짙은 갈색 카펫이 깔린, 지독하리만큼 정적이고 고급스러운 서고가 나타났다.
그곳은 인간의 법률을 다루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의 죽음을 주무르는 자의 은밀한 아카이브였다.
사방을 가득 채운 호두나무 서가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수천 권의 사건 파일들이 꽂혀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서은수의 아버지가 추적했던 30년 전 화재 사건의 연도를 찾아 서가 사이를 걸어갔다.
서고의 가장 깊은 안쪽, 백도현의 개인 집무실과 연결된 비밀 서랍을 발견했다. 나는 마스터 키카드를 대고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백도현이 그동안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정·재계 인사들의 자살 사건을 조작할 때 사용했던 '진짜 원본 유서들'과, 그 유서들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문체를 연습했던 '연습장'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큼 방대하고 추악한 대필의 역사였다. 그 속에는 3년 전 내가 멋 모르고 대필해 주었던 서연 그룹 차남 강민우의 진짜 친필 메모도 보관되어 있었다.
"이 악마 같은 자식..."
그리고 그 서랍 맨 아래쪽, 작은 벨벳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를 열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안에는 30년 전 서 형사가 인쇄소에 숨겨두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성분의 납 활자 두 개가 정교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백도현은 인쇄소에서 유실된 줄 알았던 자신의 이름 석 자, ‘도(道)’와 ‘현(賢)’의 활자를 이미 오래전에 찾아내어 이곳에 전리품처럼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완벽한 범죄 서사에 남은 마지막 오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회수해 봉인해 둔 셈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두 개의 납 덩어리를 쥐었다. 주머니 속 상자에 든 활자들과 합쳐지는 순간, 백도현의 유죄를 증명할 완벽한 아날로그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내 서고의 가독성이 꽤 마음에 드나 보군, 강우 씨."
작은 마찰음과 함께 서고의 대형 유리문이 자동으로 잠기며, 서가 뒤편의 음영 속에서 백도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뒤에는 온몸이 묶인 채 입이 막힌 서은수가 의자에 결박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나를 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백도현..."
"내가 자네의 그 천재적인 픽셀 기억력을 모를 줄 알았나? 인쇄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을 때부터, 자네가 이 활자들을 완성하기 위해 내 심장부로 걸어 들어올 오타를 낼 것이라 확신했네. 내 각본은 단 한 번도 수정을 허용한 적이 없어."
백도현이 천천히 슈트 안주머니에서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서고의 사방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들이 일제히 켜지며, 6월 15일 자로 인쇄 대기 중인 내 '가짜 자살 유서'의 텍스트들이 녹색 활자가 되어 흘러내렸다.
"자네가 훔친 그 두 개의 활자... 그게 자네의 진짜 마침표가 될 걸세. 오늘 여기서 자네가 서은수를 살해하고, 죄바카라감에 자살하는 시나리오로 내 서재의 타자기가 방금 타이핑을 마쳤거든."
백도현이 총구를 내 이마를 향해 조준했다. 내 손바닥 안의 납 활자들이 그의 살의만큼이나 차갑게 내 살을 파고들었다. 숨이 막혀오는 정적 속에서, 나는 주머니 속에 든 낡은 먹지의 감촉을 느꼈다. 2막의 중반, 나는 적의 가장 깊은 덫에 걸렸지만, 내 손 안에는 이제 그를 파멸시킬 '완벽한 문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각본가와 대필 작가의 서사가 이 거룩한 조작의 방에서 최종 교정(校正)을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