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7장: 목격자의 흔적 (Trace)


1. 잊힌 활자들의 무덤


자유로를 달리는 택시 창밖으로 자유로의 둔탁한 가로등 불빛들이 흘러내렸다. 5월의 밤안개는 한강 하류의 습기를 머금어 유독 축축했고, 파주 출판단지 외곽의 폐공장 지대는 마치 거대한 텍스트의 무덤 같았다.


김 과장이 건넨 구리 열쇠는 내 주머니 속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공터 가로질러 가자, 붉은 벽돌이 허옇게 풍화된 2층짜리 폐인쇄소가 나타났다. 문 닫은 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건물 정면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녹슨 간판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철컥, 스르륵——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쇳가루 서린 비명이 정적을 깨뜨렸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지독한 곰팡이 냄새와 녹슨 주철(鑄鐵)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랜턴 불빛을 비추자 먼지를 뒤집어쓴 거대한 윤전기들이 어둠 속에서 거대한 괴수의 뼈대처럼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사막이 아니었다. 납(Lead)을 녹여 활자를 만들고, 종이에 기름 잉크를 강하게 내리누르던, 지독하리만큼 물리적인 아날로그의 세계였다.


나는 서은수가 왜 이곳에 자신의 마지막 패를 숨겨두었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백도현이 검찰과 로펌의 권력으로 대한민국 모든 서버의 데이터를 주무를 수 있을지언정, 이 버려진 활자들의 무덤 속에 남겨진 실물 흔적까지 원격으로 삭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은수 씨... 어디 있는 겁니까."


갈비뼈의 격통을 간신히 누르며, 나는 인쇄소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판실(製版室)로 향했다. 서 형사가 30년 전 마지막으로 발을 디뎠을 그 목격자의 현장으로.


2. 은염(銀鹽) 입자가 기억하는 얼굴


제판실 안쪽, 두꺼운 차광 커튼으로 가려진 수동 현상실이 나타났다.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전, 필름을 인화하고 바카라의 도판을 만들던 아날로그 암실이었다.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그 방의 한쪽 벽면에는 뜻밖에도 수십 장의 낡은 흑백 사진들이 빨래집게에 꽂힌 채 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랜턴의 광량을 낮추고 사진들을 하나씩 비추어 보았다.


30년 전 서연 그룹 화재 현장의 참혹한 잔해, 시신을 수습하는 구급대원들, 그리고 그 폴리스라인 너머에서 노란 우비를 입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현장을 응시하고 있는 한 젊은 남자의 얼굴.


"백도현..."


지금의 오만한 대형 로펌 파트너의 얼굴이 아닌, 살의와 탐욕을 처음으로 제어하기 시작한 30년 전 초임 검사 시절의 백도현이었다. 사진 속의 그는 화재 진압이 끝나기도 전에 강 회장의 서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를 보며 기괴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은수의 아버지는 단순히 일기장을 쫓았던 게 아니었다. 그는 백도현이 현장을 '방화(放火)'하고 진실을 대필하는 순간을 이 카메라 렌즈라는 가장 정직한 눈으로 목격했던 것이다.


사진의 하단에는 서 형사의 거친 필체로 국한문혼용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범인은 문장을 고치듯 현장을 교정(矯正)했다. 불타버린 일기장의 진짜 147페이지는 윤전기 하부의 활자 상자(Type case) 속에 납으로 녹여 봉인해 두었다. 백도현이 결코 찾지 못할 아날로그의 문장으로.」



납으로 녹여 봉인한 활자. 머릿속의 알고리즘이 순식간에 맞춰졌다. 백도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살인 묵인 기록이 담긴 진짜 일기장의 원본 데이터는 파일이 아니라, 이 공장 어딘가에 '금속 활자'의 형태로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3. 활자 상자의 비밀번호


나는 현상실을 뛰쳐나와 공장 중앙의 대형 윤전기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기름때와 먼지로 범벅이 된 바닥을 기어가자, 주철로 된 거대한 바퀴 축 아래에 녹슨 철제 상자 하나가 체인에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주머니에서 핀셋을 꺼내 자물쇠의 내부 핀을 더듬었다. 대필 작가로서 손가락의 미세한 감각을 극대화했다.


핀, 핀, 찰칵——


체인이 풀리고 무거운 철제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6월의 밤하늘처럼 차가운 빛을 내뿜는 수백 개의 소형 납 활자(Lead type)들이 나무 케이스 안에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30년 전, 서 형사가 백도현의 눈을 피해 진짜 147페이지의 문장들을 활자 하나하나로 분해해 숨겨놓은 '아날로그 데이터베이스'였다.


나는 활자들을 랜턴 불빛에 대조하며 읽어내려갔다. 손 끝에 닿는 납 활자의 자획들은 날카로웠고, 먹지보다 훨씬 더 묵직한 진실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검사(檢事) 백도현(白道賢)... 서연(徐淵)의 돈을 받고 화재(火災) 원인을 조작(造作)함... 본인(本人)을 협박하여...」



백도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게 지웠다고 자부했던 그 치명적인 오타의 원형이, 내 손바닥 위에서 차가운 금속의 질감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제 이 활자들을 종이에 대고 찍어내기만 하면, 백도현의 제국은 그 즉시 붕괴할 터였다.


그때, 폐인쇄소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거센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대의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공터의 자갈을 짓밟는 소리. 이어 차 문이 거칠게 열리고,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들이 인쇄소 건물 안으로 들이닥치는 발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여기 차 열쇠 자국이 있다! 이준호가 이 안에 있어! 샅샅이 뒤져!"


4. 사냥꾼의 그물망


백도현의 포위망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병원을 나선 내 행적을 그들은 이미 실시간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갈비뼈를 죄어오는 격통에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납 활자가 든 무거운 나무 상자를 품에 안고 윤전기 뒷벽의 어두운 음영 속으로 몸을 숨겼다.


터벅, 터벅——


손전등의 거친 불빛들이 어두운 인쇄소 천장과 벽면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사내들이 파이프로 윤전기를 두들기며 내는 깡, 깡 하는 금속음이 폐공장 안을 공포의 서사로 채워갔다.


"강우 씨, 거기 있는 거 다 아네. 그만 나오지."


익숙하고 잔인한 목소리가 제판실 입구에서 들려왔다. 백도현이었다. 그는 경호원의 우산을 받으며, 먼지 날리는 인쇄소 바닥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내가 숨어 있는 윤전기 하부를 향하고 있었다.


"자네가 내 '오타'를 찾아내 복수하겠다는 그 발상은 꽤나 문학적이었어. 하지만 현실은 자네가 쓰는 소설이 아니야. 자네가 지금 안고 있는 그 납 활자들... 그게 세상에 찍혀 나오기 전에, 자네의 심장에 먼저 마침표가 찍힐 걸세."


백도현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사내들이 총구를 겨누며 내가 숨은 철제 축을 포위해 왔다. 퇴로는 없었다. 내 손에 든 것은 디지털 반격 코드가 아닌, 무겁고 무력한 납 덩어리들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내 발밑에 서은수가 탈출할 때 쏟아부었던 에탄올의 잔해와, 인쇄소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수십 통의 정착액 드럼통들을. 디지털 방화벽은 깨졌지만, 아날로그의 물리 법칙은 여전히 유효했다.


"백 변호사님, 각본가는 당신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은수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7장으로 향하는 막다른 길목에서, 나는 내 수명을 깎아 먹던 시한폭탄의 타이머를 내 손으로 직접 가속하기로 결심했다. 불꽃이 라이터 끝에서 튀어 오르는 순간, 각본가와 대필 작가의 목숨을 건 진짜 아날로그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작가의 이전글새소리 속의 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