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4장: 숨겨진 단서


1. 각본가의 지배 법칙


백도현 변호사가 걸어 들어오자, 지하 복원실의 희박한 공기가 단숨에 그에게 귀속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색 슈트의 깃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구두 굽이 콘크리트 바닥을 딛는 소리는 아날로그시계의 초침처럼 정확했다. 그의 손에 들린 투명 지퍼백 안에는 내가 황학동에서 사 온 크로바 타자기의 'ㅂ'과 'ㄹ' 활자 대가 들어있었다. 내 서재에 침입했던 괴한이 바로 그의 수하였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었다.


"서연 그룹 강 회장의 일기장, 그리고 국내 최고의 대필 작가와 집요한 복원가."


백도현은 안경테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작업대 위의 불탄 바카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잘 짜인 체스판의 말들을 검토하는 설계자의 그것이었다.


"이보다 완벽한 구성은 없지. 한강우 씨, 자네가 내 중개를 받아 작성했던 그 수많은 법조계와 정계 자제들의 유서들... 그게 왜 잡음 없이 통과되었을 것 같나? 내가 자네라는 정교한 펜을 법정이라는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비호(庇護) 해 주었기 때문이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새어 나왔던 타인의 죽음들, 그 거대한 비극의 유통망 종점에 서 있는 남자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그런데 왜 내 유서를 미리 써둔 겁니까? 6월 15일, 한강 하수처리장이라고 장소까지 박아서."


내 날카로운 질문에도 백도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미소는 더 깊고 잔인해졌다.


"자네는 너무 뛰어난 예술가야, 강우 씨. 예술가들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불필요한 영웅심이나 양심(良心) 같은 오타를 내곤 하지. 이 일기장의 복원이 끝나면 자네의 문체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네. 완벽한 위작(僞作)은 원작자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진품이 되는 법이니까."


그는 지퍼백을 서은수의 작업대 위에 툭 던졌다.


"시간은 한 달 주겠네. 30년 전 강 회장이 남긴 이 일기장의 타버린 행간을 자네의 그 완벽한 문체로 메워놓게. 강 회장이 자살하기 전, 자신의 모든 비자금과 로비 장부를 나와 서연 그룹의 현 경영진에게 합법적으로 승계한다는 내용으로. 거부한다면..."


백도현의 시선이 서은수에게 머물렀다.


"서은수 씨의 아버지가 30년 전 옥상에서 떨어질 때 남겼던 그 조잡한 유서, 기억하나? 이번엔 훨씬 더 정갈한 문체로 그녀의 유서를 대필해야 할 걸세. 자네 손으로 직접."


2. 텍스트의 감옥


백도현이 남겨둔 수하들이 복원소 입구를 감시하기 시작하면서, 나와 서은수는 지하의 거대한 텍스트 감옥에 갇힌 꼴이 되었다. 백도현은 우리에게 퇴로를 주지 않았다. 일을 완수해도 죽음(6월 15일의 유서)이 기다리고 있었고, 거부하면 당장 서은수의 목숨이 위험했다.


"미안해요, 한강우 씨. 나 때문에 당신까지 이 각본에 휘말리게 해서."


서은수가 정밀 랜턴을 켜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고서적 복원가 특유의 집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제 문체가 저 일기장에 박제되어 있던 순간부터, 전 이 사건의 중심부에 서 있었던 겁니다. 원망하려면 내 재능을 원망해야겠지요."


나는 노트북을 켜고 서은수가 디지털화한 일기장의 스캔본을 띄웠다. 백도현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위조가 아니었다. 30년 전의 종이 질감, 잉크의 성분 분석은 서은수가 맡고, 그 위에 얹어질 '강 회장의 영혼이 담긴 문장'의 복원은 내 몫이었다.


나는 밤을 새워 강 회장의 평소 어투와 백도현이 준 로비 장부의 수치들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수록 머릿속의 알고리즘이 가동되었다. 그런데 새벽 4시경, 일기장의 147페이지를 디지털 필터로 확대해 보던 중, 내 눈이 한 지점에서 정지했다.


"은수 씨,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3. 지워진 행간 속의 오타(Error)


내가 가리킨 모니터 화면에는 불에 까맣게 그을려 형태가 일그러진 한자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백도현의 기술자들은 이 부분을 단순히 '비자금 전달 내역'으로 해석하고 우리에게 복원을 명했었다.



「정치자금(政治資金) 삼십억(三十億)... 배달(配達) 완료...」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정형화된 배열 너머에 숨겨진 진짜 규칙이 보였다. 대필 작가로서의 내 천재성은 문맥을 완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장 속에 숨겨진 의도적인 '오류'를 찾아내는 데 있었다.


강 회장은 평소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를 쓸 때, 돈을 뜻할 때는 반드시 '金'이 아닌 '錢'이라는 글자를 고집하는 버릇이 다른 페이지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유독 이 147페이지의 로비 장부 구간에서만 '金'이라는 글자가 어색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이건 강 회장의 문체가 아니야."


"그럼 누구의 문체란 말인가요?"


나는 화면을 더 확대했다. 글자의 자획과 자획 사이, 잉크가 번진 미세한 압력을 픽셀 단위로 분석했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결론에 도달했다.


"백도현 변호사... 그놈의 문체야. 이 일기장은 30년 전 화재로 불타기 전, 이미 백도현의 손에 의해 한 번 '오염'되었던 겁니다. 그놈이 강 회장의 비자금 장부 중 일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위조해 둔 거였어요. 하지만 그놈은 문학적 대필 전문가가 아니니, 자신이 가진 고유의 문장 습관인 '金'의 남발을 차마 숨기지 못한 거지."


백도현이 숨기려 했던 진짜 약점. 그는 완벽한 각본가를 자처했지만, 30년 전 자신의 풋내기 시절 저지른 치명적인 '오타'를 이 불탄 일기장 속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4. 반격의 행간을 쓰다


"백도현은 자신이 위조했던 이 147페이지가 세상에 드러날까 봐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내 문체를 이용해 아예 이 페이지를 덮어 쓰려하는 거고요."


내 설명에 서은수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렇다면 이 오타가... 백도현을 무너뜨릴 단서가 될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그놈이 우리에게 각본을 던졌다면, 우리는 그 각본의 행간에 그놈이 눈치채지 못할 '치명적인 버그'를 심어야 합니다."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대필 작가로서 타인의 문장을 베끼던 손가락이, 처음으로 거대 권력의 각본을 해킹하기 위한 무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백도현이 원하는 승계 문장을 작성하는 척하면서, 문장 부호의 간격과 특정 단어의 조합 속에 30년 전 백도현이 저지른 위조의 증거(해시값)를 역으로 증명하는 코드를 텍스트 형태로 심기 시작했다.


그때, 복원소 벽면에 설치된 인터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삐이——


입구를 감시하던 백도현의 부하가 스피커 너머로 거친 목소리를 뱉어냈다.


"한강우 씨, 서재에서 가져온 당신 노트북을 분석해 봤는데...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나오더군. 당신 3년 전에 사망한 '서연 그룹 차남'의 유서도 대필했었지? 백 변호사님이 지금 그 건으로 자네를 다시 보자고 하시는군."


노트북 화면 위로 내가 심어놓은 반격의 문장들이 퍼렇게 번쩍였다. 과거의 죄악이 다시 내 발목을 잡으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나와 서은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결코 멈출 수 없는, 목숨을 건 잔혹한 문장 교정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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