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백도현의 수하가 인터폰 너머로 뱉어낸 '서연 그룹 차남 사건'이라는 단어는, 내 뇌의 가장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죄바카라감의 서랍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3년 전, 나는 중개인을 통해 거액의 제안을 받고 의문의 유서 한 장을 대필했었다. 주식 투자 실패로 상심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기록된 서연 그룹의 차남 강민우. 나는 그가 평소 쓰던 이메일의 어투를 분석해 지독하리만큼 정교한 유서를 연출해 주었다. 하지만 그 대필 유서가 완성된 직후, 강민우의 사인(死因)은 자살로 종결되었고 서연 그룹의 경영권은 고스란히 그의 형에게 승계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만진 그 잉크가 사실은 타살을 자살로 세탁하는 악마의 지우개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각본의 막후에 백도현 변호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한강우 씨, 얼굴색이 좋지 않네요."
지하 복원소의 무거운 문을 열고 백도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내 과거 대필 로그가 찍힌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자네가 3년 전에 완성해 준 그 아름다운 유서 덕분에, 서연 그룹의 경영권 승계가 아주 매끄럽게 끝났지. 자네는 이미 내 각본의 훌륭한 공범(共犯)이었어. 이제 와서 정의로운 소설가 흉내를 내며 내 일기장에 오타를 심으려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백도현은 내 노트북 화면을 쓱 훑어보았다. 내가 숨겨두었던 문체 분석 코드를 그가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안광은 내 심장을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내일까지 일기장의 147페이지를 내가 원하는 문장으로 완전히 덮어쓰게. 만약 다른 잔머리를 굴린다면, 3년 전 자네가 쓴 그 대필 로그를 검찰에 직접 넘기겠네. 자네의 그 잘난 손가락에 수갑이 채워지는 서사도 꽤나 흥미롭지 않겠나?"
백도현은 비릿한 미소를 남긴 채 복원소를 나갔다. 철문이 닫히고 다시 찾아온 정적 속에서,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타인의 죽음을 베끼며 벌어먹던 내 손가락들이, 결국 내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어 돌아와 있었다.
"강우 씨, 정신 차려요. 저 자의 각본대로 움직이면 우리는 결국 6월 15일에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서은수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정갈한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작업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카세트테이프 한 장을 꺼내 소형 플레이어에 넣었다.
지직—— 지직——
테이프가 돌며 30년 전의 하얀 소음 사이로, 잔뜩 긴장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수의 아버지이자, 당시 화재 사건을 담당했던 서 형사의 목소리였다.
"강 회장의 일기장은 단순한 비자금 장부가 아니다. 그 안에는 백도현이 초임 검사 시절 저지른 살인 묵인 기록이 들어있다. 백도현이 지금 이 일기장을 없애려 한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일기장의 147페이지를..."
탁——
오디오가 거칠게 끊기며, 뒤이어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서 형사의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지독하리만큼 냉정하고 익숙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테이프를 채웠다.
"서 형사, 유서는 내가 아주 그럴듯한 문체로 대신 써주지. 자네 자식 놈이 평생 읽으며 울 수 있도록."
백도현의 목소리였다.
서은수의 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내려 작업대 위의 고서적 위로 떨어졌다. 백도현은 30년 전부터 타인의 유서를 대필해 오며 자신의 죄를 세탁해 온 진짜 '최초의 각본가'였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요. 이 일기장의 해킹 코드가 완성되는 대로, 여기서 탈출해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도현의 범죄 DNA를 증명할 147페이지의 보정 작업을 마친 뒤, 나는 내 노트북과 은수의 가죽 가방을 챙겼다. 밤 12시, 복원소의 환기 가동 시간으로 인해 경비원들의 교대 주기가 발생하는 유일한 5분의 틈새였다.
서은수는 고서적 복원용 화학 약품인 에탄올과 아세톤 병을 바닥에 가득 쏟아부었다.
"저들이 우리가 조작한 일기장을 눈치채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요."
은수가 라이터를 켜서 바닥에 던지자, 순식간에 푸르스름한 화학 불꽃이 지하 복원실을 집어삼키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화재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천장의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졌다.
"화재다! 지하에 불이 났다!"
복도 끝에서 백도현의 수하들이 당황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서은수는 연기 속을 뚫고, 고서적 운반용 화물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 후문 통로를 향해 질주했다. 물에 젖은 옷이 가죽처럼 몸에 달라붙었고, 매운 연기가 폐부를 찔러왔다.
화물 엘리베이터의 낡은 철문을 열고 지상으로 탈출했을 때, 광화문의 빌딩 숲 위로 차가운 새벽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우 씨, 이쪽이에요! 제 차가 근처 공영주차장에 있어요."
은수가 빗속을 뚫고 앞장서 달렸다. 네온사인 불빛이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기괴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그녀의 낡은 세단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 와이퍼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유리창을 닦아냈다.
차는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와 어두운 대로변으로 진입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추격하는 차량의 라이트는 보이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조수석에서 백도현의 오타를 심어둔 노트북을 꼭 쥐었다. 1막의 긴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차는 서강대교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비바람에 한강의 물결이 검은 괴물의 가죽처럼 출렁였다.
"강우 씨, 일단 제 안전가옥으로 가요. 그곳에 아버지가 남긴 나머지 수사 기록이..."
은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쾅——!!!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차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교차로 음영 지역에서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던 거대한 덤프트럭 한 대가, 고의적으로 우리 차의 운전석 측면을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유리창이 폭발하듯 깨져나갔고, 차는 아스팔트 위를 몇 바퀴나 뒹굴며 전복되었다. 사방이 뒤집히는 시야 속에서 내 몸은 안전벨트에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렸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피가 눈을 가렸다.
지독한 이명(耳鳴) 소리 사이로, 트럭에서 내린 검은 우비의 사내들이 깨진 운전석 문을 강제로 뜯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기절한 서은수를 차 밖으로 거칠게 끌어내어 자신들의 차량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은수 씨... 은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붉은 피 너머로, 트럭 운전석에서 천천히 내려와 전복된 차 앞에 서는 한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백도현 변호사였다. 그는 비를 맞으며, 차 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아까 내가 테이블 위에 두고 온 줄 알았던, 내 진짜 '살인 예고장 먹지'가 들려 있었다.
백도현은 구두 굽으로 내 노트북을 밟아 산산조각을 냈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틈새로 먹지를 툭 던져 넣으며 속삭였다.
"첫 번째 챕터의 마침표는 내가 찍지, 강우 씨. 자네의 유서에 적힌 날짜를 바꾸려고 하지 말게. 각본은 절대 수정되지 않으니까."
백도현의 차가 빗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마치 내 장례식의 서곡처럼 울려 퍼졌다. 1막의 막이 내리는 순간, 나의 구원이었던 서은수는 납치되었고, 나는 예정된 죽음의 날짜를 향해 강제로 타이핑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