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3장: 서은수라는 문장


1. 지독한 정적의 방


새벽에 받았던 의문의 메일은 단순한 디지털 텍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정표였다. 메일에 링크된 좌표를 따라 찾아간 곳은 세종로 뒷골목, 오래된 석조 건물 지하에 위치한 ‘가람 고서적 복원소’였다. 광화문의 화려한 빌딩 숲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마치 다른 세기(世紀)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눅눅하고 어두웠다.


지하의 무거운 철문을 열자,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오래된 종이가 썩어가는 냄새와 한약재 같은 정착액 향기였다. 사방의 선반에는 형체를 알 수 없이 바스러진 서바카라들과 누렇게 변색된 문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가습기가 뿜어내는 하얀 연기 너머로, 커다란 작업대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예약하신 분인가요?"


여자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며, 마치 오래된 도서관의 서고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그녀는 정밀 핀셋을 이용해 불에 타다 남은 한지 조각을 조심스럽게 맞추고 있었다.


"한강우라고 합니다. 오늘 새벽에... 의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여자가 핀셋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특유의 정갈하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작은 명찰에는 ‘서은수’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내 살인 예고장 속에서 내 심장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 예언된 바로 그 이름이었다.


"아, 그 대필 작가님이시군요.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서은수는 얇은 라텍스 장갑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절제되어 있어, 마치 잘 쓰인 문장처럼 단 한 군데의 불필요한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 듯했다.


2. 가독성(Readability)의 함정


"저에게 의뢰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다음 페이지를 위해서라는 기묘한 문구와 함께."


나는 서은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직구로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당혹감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찻잔 두 개를 꺼내 따뜻한 차를 따랐다.


"제가 보낸 메일이 아니에요, 한강우 씨. 전 누군가에게 대필 작가를 추천해 달라고 했을 뿐이죠.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메일을 보냈을 줄은 몰랐네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백도현 변호사. 내게 이 고서적의 복원을 의뢰한 사람이자, 당신에게 은밀한 유서들을 중개해 주던 그 브로커 집단의 정점에 있는 사람."


서은수가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가죽 표지의 바카라 한 권을 가리켰다. 표지는 시커멓게 불에 타 있었고, 내부의 종이들은 습기에 찌들어 서로 붙어 있었다.


"백 변호사는 이 바카라의 복원을 제게 맡기면서, 동시에 이 바카라을 쓴 저자의 '문체'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라고 했어요. 위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워진 행간을 메우기 위해서라더군요. 그 분야의 최고가 바로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서은수가 건넨 차를 마시지 않은 채 가만히 놔두었다. 백도현 변호사. 내가 브로커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서초동 법조계의 거물이자 내 대필 유서들의 최종 소비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왜 내 미래의 유서를 작성하고, 서은수라는 여자에게 나를 인도한 것일까.


"이 바카라은 무슨 바카라입니까?"


"30년 전, 의문의 화재로 사망한 어느 대기업 회장의 비밀 일기장이에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하지만 그 안에는 당시 정·관계 로비 자금의 흐름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위험한 문장들이죠."


서은수는 바카라의 한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특수 광학 렌즈를 통해 확대된 화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불에 타서 가독성이 극도로 떨어진 아날로그 활자들. 하지만 내 눈은 직업적으로 그 활자들의 배열에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포착해 냈다.


3. 문장 속의 악마


모니터 화면에 뜬 30년 전의 일기장. 그 불타버린 텍스트의 행간을 훑어내려가던 내 손끝에 오한이 일었다.


"이 문장 부호들... 보입니까?"


내가 모니터의 특정 지점을 가리키자, 서은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문장 중간에 삽입된 기묘한 하이픈(——)과 불필요할 정도로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한문 병기 습관. 그것은 30년 전 죽은 대기업 회장의 버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평소에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오직 나만의 문체적 인장(Signature)이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왜 30년 전 일기장에 적혀 있는 거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타자기의 먹지에는 한 달 뒤 내 죽음이 적혀 있었고, 30년 전의 고서적에는 내 문체가 박제되어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나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뒤틀려 있었다.


"한강우 씨, 당신은 30년 전에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아주 어렸을 때예요. 하지만 이 바카라의 진품을 소유했던 백도현 변호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의 문체를 '학습'하고 있었다는 뜻이 돼요. 왜 그랬을까요?"


서은수의 질문이 내 심장을 찔렀다. 대필 작가로서 나는 수많은 유서를 조작해 왔지만, 정작 내 인생 전체가 누군가에 의해 거대하게 조작되고 대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백도현은 내가 이 고서적을 분석하게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과거의 진실'을 내 손으로 재구성하게 만든 뒤, 6월 15일 한강 하수처리장에서 나를 자살로 위장해 처단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내가 쓴 미래의 유서는, 사실 백도현이 내 문체를 복사해 미리 인쇄해 둔 '살인 집행서'였다.


4. 뒤틀린 행간을 교정하다


"은수 씨, 당신은 이 바카라에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서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업대 서랍에서 낡은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제 아버지가 30년 전 그 화재 현장의 담당 형사였어요. 아버지는 이 일기장의 존재를 추적하다가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셨죠. 자살로 처리된 아버지의 유서... 그것 역시 대필된 것이었어요. 누군가 아버지의 문체를 완벽하게 베껴서 가짜 유서를 남겼죠. 난 평생 그 '글쟁이'를 찾아 헤맸어요."


서은수의 눈에 서린 서늘한 증오를 보며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가 찾는 글쟁이, 타인의 죽음을 완벽한 문장으로 조작해 온 각본가. 그것은 백도현이거나, 혹은... 나보다 앞서 그 일을 해왔던 내 전임자일 터였다.


그때, 복도 음지에서 거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지하 복도의 벽면을 타고 울리는 발소리는 지독하리만큼 규칙적이었고, 그 무게감은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서은수와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죽였다. 복원실의 반투명 유리문 너머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클릭-


복원실의 도어락이 해제되는 전자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문이 열리며 들이닥친 것은, 남색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대형 로펌의 파트너, 백도현 변호사였다. 그의 손에는 내 서재에서 사라졌던 낡은 타자기의 활자 대 몇 개가 봉투에 담긴 채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이 드디어 마주했군. 시나리오의 인물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만큼 작가로서 짜릿한 순간은 없지."


백도현은 안경을 고쳐 쓰며 잔인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3장의 막이 내리는 순간, 내 죽음의 각본가는 내 눈앞에 실체를 드러냈고, 나와 서은수는 그가 설계한 거대한 잔혹 서사의 한복판에 갇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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