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2장: 발견된 유서
죽은 자들의 문장을 세탁하는 일은 기묘한 지체 현상을 남긴다. 서초동 법조인 자제분의 유서 대필을 끝내고 의뢰비를 정산받은 뒤에도, 내 손가락 끝에는 그가 자주 쓰던 비창(悲愴)이니 염세(厭世)니 하는 단어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뇌를 식혀야 했다. 가짜 진실을 조립하는 디지털 모니터의 푸른빛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황학동의 벼룩시장 골목을 헤매곤 했다. 0과 1로 환산되지 않는, 먼지와 녹슨 철의 냄새가 가득한 그곳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자취 같았다.
그 크로바 수동 타자기를 만난 것은 일주일 전, 가랑비가 내리던 화요일 오후였다.
사방이 깨진 축음기와 출처를 알 수 없는 가구들로 가득 찬 골동품점의 가장 깊은 구석.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던 검은색 철제 기계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1970년대 산 크로바 수동 타자기. 요즘 세대의 매끄럽고 소리 없는 키보드와 달리, 활자 대가 물리적으로 종이를 때려 잉크를 박제하는 투박하고 정교한 메커니즘의 결정체였다.
"그거 작동은 안 될 거요. 내부 실린더가 다 굳어서 톱니가 돌지 않아."
가게 주인은 담배 연기를 뱉으며 무심히 말했지만, 내 눈에는 그 기계가 마치 지독한 불면(不眠)에 걸린 채 굳어버린 어떤 유령처럼 보였다. 나는 홀린 듯 지갑을 열었다. 주인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고 마포의 서재로 그것을 들고 왔을 때, 내 손에는 시커먼 기계유와 수십 년 묵은 먼지가 가득 묻어 있었다.
새벽 3시. 또 한 건의 대필 작업을 마친 나는 자정의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그 검은 기계를 올려놓았다. 미싱 오일과 세척용 알코올, 빳빳한 솔과 핀셋을 준비했다. 밤새 모니터를 노려보느라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뜨며, 나는 타자기의 상단 커버를 분리했다.
철제 활자 대들 이 촘촘하게 얽혀 있는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A'부터 'Z'까지, 그리고 한글의 자음과 모음들이 정교한 스프링과 맞물려 배열되어 있었다. 나는 알코올을 적신 천으로 활자의 머리 부분을 하나씩 닦아내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기계유가 녹아내리며 철 고유의 비릿한 냄새가 서재의 공기를 채웠다. 활자 대를 하나씩 누를 때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철제 다리들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을 향해 뻗어 올랐다.
청소는 자음 'ㅂ'을 닦아낼 때쯤 멈췄다. 활자가 종이를 때릴 때 그 충격을 받쳐주는 굵은 고무 롤러(Platen)의 왼쪽 하단, 기어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좁은 사각지대에 무언가 이질적인 물질이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오랜 세월 동안 먼지가 엉겨 붙어 굳어버린 찌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핀셋으로 끝을 살짝 건드리자,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종이의 마찰음이 들렸다. 오래되어 경화(硬化)된 고무 롤러 안쪽 깊숙한 곳에 고착되어 있던 얇은 종이 조각이었다.
나는 핀셋의 각도를 조절해 그것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톱니바퀴의 날카로운 날에 걸려 찢어지지 않도록, 숨을 죽인 채 밀리미터 단위로 힘을 조절했다. 기계의 내부에서 수십 년 만에 바깥공기를 마시며 나온 것은, 사방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한 장의 '검은색 먹지(Carbon paper)'였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먹지. 컴퓨터와 프린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타자기에 하얀 종이 두 장을 겹치고 그 사이에 이 검은 종이를 끼워 타이핑을 하면 뒷장에 똑같은 복사본이 만들어지곤 했다.
대필 작가로서 나는 이 얇고 서늘한 종이의 속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먹지는 주인의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한 일종의 일방통행식 기록 장치다. 철제 활자가 먹지를 강하게 내리칠 때마다 검은 잉크가 앞 장으로 옮겨가고, 먹지 자체에는 투명하게 구멍이 뚫린 문장의 잔상(殘像)이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빛에 비추어 보지 않는 한 결코 읽을 수 없는, 오직 어둠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령의 텍스트.
나는 스탠드의 불빛을 가장 강하게 켰다.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검은 먹지의 양 끝을 잡고 화면을 마주하듯 불빛에 가까이 비추어 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타자기의 차가운 철제 실린더 속에 갇혀 있던 활자의 흉터들이 불빛을 통과하며, 투명한 은백색의 문장들이 되어 내 눈망울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처음 몇 줄은 판독하기 어려웠다. 활자가 겹쳐 찍힌 탓에 알파벳과 자음들이 뒤엉켜 기괴한 추상화처럼 보였다. 나는 먹지를 조금씩 기울이며 빛의 굴절을 이용해 낱말들을 분리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끗하게 찍힌 문장의 첫 단어에 시선이 닿았을 때, 내 심장은 박동을 멈췄다.
「나 한강우(韓江宇)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긴 불면(不眠)의 밤을 끝내려 한다. 마포(麻浦)의 서재는 지나치게 추웠고, 내가 만든 가짜 문장들은 밤마다 나를 찾아와 목을 졸라왔다. 고독(孤獨)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나는 잉크를 마시듯 숨을 쉬었다.」
"이게... 왜..."
손끝이 통제 불능 상태로 떨렸다. 먹지가 거칠게 흔들리며 은백색의 문장들이 불빛 속에서 일그러졌다. 동명이인일 리가 없었다. 한강우라는 세 글자의 이름 뒤로 이어지는 문장의 독특한 호흡, 단어와 단어 사이에 배치된 기묘한 문장 부호의 간격, 그리고 내가 글을 쓸 때 결벽증처럼 집착하는 특유의 문장 부호 배열(——)과 한문 병기 습관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이것은 분명 내가 쓴 글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수동 타자기를 산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이 방에서 타자기로 글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이 먹지는 타자기 고무 롤러의 경화 상태로 보아 최소한 수십 년 전부터 그 자리에 끼어 있던 것이 분명했다. 과거의 기계 속에 미래의 내가 쓸 문장이 박제되어 있다는, 이 지독한 인과율의 붕괴 앞에서 내 언어 중추는 마비되어 버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먹지의 하단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곳에는 투명하게 뚫린 문장들이 더 날카롭고 선명한 형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저주의 시나리오였다.
「2026년 6월 15일 밤 11시. 한강 대교 남단 하수처리장. 그 음습(陰濕)한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내 심장에 마지막 마침표가 찍힐 것이다. 서은수(徐恩秀), 그녀가 가져온 고서적(古書籍)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 행간(行間)에 숨은 악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한(悔恨)은 늦었고, 잉크는 이미 말라버렸다.」
2026년 6월 15일 밤 11시.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오늘 날짜는 2026년 5월 21일 목요일 오전 10시.
정확히 한 달 뒤였다. 날짜와 시간, 장소, 그리고 내가 살해당한 뒤 자살로 완벽하게 조작될 것이라는 결론까지 적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나의 살인 예고장'이었다.
댕—— 댕——
서재 벽면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타종을 울렸다. 그 무거운 금속음이 내 고막을 때릴 때마다, 마치 내 수명의 초침이 강제로 깎여 나가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먹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검은 종이는 불빛을 잃자 다시 평범하고 죽은 종이 조각으로 돌아갔지만, 내 망막에 새겨진 은백색의 문장들은 지워지지 않고 붉은 잔상으로 번뜩였다.
대필 작가로 활동하며 나는 수백 편의 죽음을 만져왔다. 그것들은 모두 이미 벌어진 비극에 대한 과거의 기록이었고, 남겨진 자들을 위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내 손으로 황학동에서 건져 올린 이 기계는 미래의 죽음을 출력하고 있었다.
"서은수(徐恩秀)..."
유서의 말미에 선명하게 각인된 그 이름. 내 기억의 서랍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대필해 주었던 의뢰인들의 데이터베이스, 나를 거쳐 간 중개인들의 명단, 심지어 무명 소설가 시절 스쳐 지나갔던 문단 관계자들의 이름 속에도 '서은수'는 없었다.
누군가 정교한 설계도를 짜고 나를 그 서사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유서가 초자연적인 예언서가 아니라면, 이것은 나를 가장 잘 아는 누군가가 기획한, 가장 문학적이고 잔인한 타살 계획서였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타인의 죽음이나 대필하고 있다 보면, 나는 한 달 뒤 이 먹지에 새겨진 문장 그대로 한강 변의 차가운 시체가 되어 발견될 터였다. 그리고 세상은 '타인의 죽음만 쓰다가 정신이 붕괴해 버린 무명 소설가의 비극적인 자살'로 이 사건의 파일 표지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과부하가 걸리기 직전, 바카라상 위 노트북 화면이 밝아지며 하얀 불빛을 뿜어냈다. 고요한 서재의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메일 알림음이 울렸다.
딱-
발신인은 주소조차 유추할 수 없는 익명의 클라이언트였다. 메일의 제목은 비어 있었고, 첨부 파일도 없었다. 오직 본문에 단 한 줄의 문장만이 서늘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의뢰: 고서적 복원가 서은수(徐恩秀). 그녀의 문체를 분석하고 조립해 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다음 페이지를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노트북의 하얀 LED 광원 위로, 아까 타자기 먹지에서 보았던 투명한 은백색의 문장들이 유령처럼 오버랩되었다.
누군가 내 인생이라는 바카라의 '편집 권한'을 강제로 쥐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엔터 키를 두드리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내 죽음의 초고를 스스로 수정하고 내 삶의 마침표를 지워버리기 위해, 나는 이 잉크가 마르기 전, 나를 기다리는 악마의 행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나는 외투를 챙겨 입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의 거리로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내 살인 예고장 속에 유일하게 적힌 단서, 서은수라는 문장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