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소설

by산들강바람

제1장: 문장을 베끼는 남자


1. 데드 마스크(Dead Mask)의 문장학


유서(遺書)란 일종의 텍스트로 만든 데드 마스크(Dead Mask)다. 사람이 남긴 마지막 표정을 가장 정갈한 활자로 박제하는 작업. 나는 그 무겁고 서늘한 마스크를 전문적으로 찍어내는 대필 작가(Ghostwriter)다.


사람들은 유서가 감정의 격정적인 폭발이나 눈물 섞인 회한 속에서 쓰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차갑고 기술적인 서사에 가깝다. 죽음을 결심한 인간의 뇌는 극도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일종의 시스템 방어기제를 가동한다. 그 결과 문장은 지나치게 비약되거나, 반대로 지독하리만큼 건조해진다. 유족들이 시신 앞에서 "이건 우리 아이가 쓴 글이 아니에요"라고 울부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죽음의 문턱에서 평소의 문체(文體)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의 인간은 대개 자신의 언어를 잃고 방황하는 유령이 된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어색한 균열을 메우는 것이다. 의뢰인이 남긴 몇 줄의 유품, 오래된 일기장, 평소에 쓰던 블로그나 SNS 게시글의 폰트와 문장 부호의 습관을 분석한다. 마침표를 찍는 위치, 쉼표를 남발하는 버릇, 자주 쓰는 한문 병기(漢文 倂記)의 빈도와 비속어의 습관까지 계산해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고 나면, 완벽하게 '그 사람다운' 유서의 초고가 인쇄되어 나온다.


"이번 건은 서초동 법조인 자제분입니다. 음독자살로 마무리가 되어야 유산 상속 분쟁이 깔끔해집니다. 유족들이 의심하지 않게, 그 친구 특유의 냉소적인 어투를 잘 살려주십시오."


어둠이 짙게 깔린 자정, 브로커가 건넨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바카라상 위에 올려두고 나는 듀얼 모니터의 전원을 켰다. 화면의 푸른빛이 내 수척한 뺨을 시리게 비추었다. 서른여섯의 나이. 내 이름으로 된 단 한 권의 소설을 쓰겠다고 청춘을 바치며 발버둥 쳤지만, 등단 문턱에서 좌절한 내게 남은 것은 타인의 죽음을 대신 서술해 주며 벌어먹고 사는 이 기괴한 기술뿐이었다.


방 안은 지독하리만큼 조용했다. 오직 컴퓨터 본체의 냉각팬이 돌아가는 하얀 소음(White noise)만이 가득했다. 서류 봉투를 열자 한 젊은이의 삶이 파편화된 데이터로 쏟아져 나왔다. 대학 시절 리포트, 연인과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록, 그리고 평소 서재에 꽂아두었다던 고전 문학 서적들의 밑줄 흔적들.


나는 모니터에 메모장을 띄우고 그의 문장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장 중간에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려운 한자어를 섞어 쓰는 버릇이 있었다. 예컨대 '슬프다'라는 직관적인 단어 대신 '비창(悲愴)하다'거나 '염세(厭世)적'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식이었다. 문장의 호흡을 분석하고, 그의 자취를 베끼는 작업이 시작되자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밤은 깊어갔고, 나는 또 한 명의 유령을 세상에 탄생시키고 있었다.


2. 픽셀 뒤에 숨은 유령들


디지털 세상은 친절하면서도 잔인하다. 인간이 살아생전 뿜어내던 온기는 스크린이 꺼지는 순간 완벽하게 차단되지만, 그가 남긴 텍스트 로그는 서버의 어두운 구석에 영원히 박제된다. 내가 다루는 것은 그 죽은 데이터들의 잔해다.


서초동의 그 젊은이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 하고 있었다. 브로커가 건넨 메신저 대화록을 읽어 내려갈수록, 내 안의 알고리즘은 그의 영혼을 기계적으로 해체했다. 그의 문장에는 독특한 리듬이 있었다. 그는 문장의 끝을 항상 '...'이라는 말줄임표로 흐리는 습관이 있었고, 감정이 격해질 때면 주어와 목적어의 위치를 뒤바꾸는 도치법을 자주 썼다.


「가고 싶지 않아, 그곳에 나는.」


그가 친구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단순한 비문(非文)이 아니었다. 그것은 극심한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뇌의 언어 중추가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나는 모니터 화면에 그의 문장 부호 사용 빈도를 차트로 띄웠다. 쉼표의 빈도가 평소보다 세 배 이상 높아진 지점, 그것이 그가 절망의 늪으로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나는 그의 필체를 대조하기 위해 그가 손으로 쓴 대학 시절의 강의 노트도 스캔했다. 글씨의 경사도, 자음 'ㄹ'을 쓸 때 끝을 흘리는 각도, 볼펜을 쥐는 악력의 세기까지 디지털 수치로 환산되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단순하지."


혼잣말이 텅 빈 서재를 울렸다. 아무리 복잡한 고뇌와 슬픔을 가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국 내 모니터 위에서는 몇 바이트의 데이터와 정형화된 문체적 특징으로 요약될 뿐이었다. 나는 그가 자주 사용하던 한자어들을 조합하여 유서의 서두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본인(本人)의 삶은 언제나 이방(異邦)의 경계에서 표류(漂流) 해 왔다. 서초동의 그 화려한 불빛들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온기(溫氣)를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부친(父親)의 기대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서 서서히 질식해 갈 뿐이었다.」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질 때마다 기묘한 쾌감과 함께 깊은 허무감이 밀려왔다. 이것은 나의 글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의 글도 아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진실만을 소비한다. 내가 쓰는 유서는 죽은 이의 진짜 유언이 아니라, 유족들과 법원이 상속과 합의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가장 이상적인 각본'이었다.


3. 타인의 고독을 마시는 시간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자 서재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마포의 오래된 빌라 4층에 위치한 내 서재는 사방이 바카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바카라들은 내가 한때 꿈꿨던 위대한 문학가들의 유산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방음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나는 식어버린 블랙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혀끝을 맴도는 씁쓸한 탄 맛이 내 일상의 유일한 감각이었다. 대필 작가로 활동한 지 어느덧 5년. 그동안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인간의 고독을 대리 배설해 왔다.


재벌가 서자의 억울한 유언, 도박 빚에 시달리던 가장의 처절한 사죄, 사랑을 잃은 여대생의 서글픈 마지막 편지까지. 내 손을 거쳐 간 죽음만 해도 셀 수가 없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의 고독을 문장으로 옮길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파 먹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타인의 슬픔을 완벽하게 베끼기 위해서는 내 감정의 주파수를 그들의 절망에 맞추어야만 했다. 그것은 영혼을 조금씩 깎아 먹는 화학 작용과도 같았다.


"선배, 형은 왜 맨날 남의 죽음만 써? 형 소설은 언제 쓸 건데?"


언젠가 술자리에서 후배가 던졌던 질문이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소설을 쓰려고 흰 화면을 마주하면, 그 위로 내가 대필했던 죽은 이들의 문장 부호들이 유령처럼 출몰했기 때문이다. 마침표는 나를 주저앉혔고, 쉼표는 내 숨통을 조였다. 내 언어는 이미 타인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잉크 속에 오염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마우스 휠을 굴려 서초동 자제분의 유서 초고를 검토했다.


「이 지독한 불면(不眠)의 밤을 끝내려 한다. 나의 마침표는 타인의 슬픔보다 가벼울 것이니, 부디 본인(本人)의 부재(不在)에 과도한 서사(敍事)를 부여하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문체 분석 알고리즘이 98%의 일치율을 보이며 녹색 불을 켰다. 이 유서가 법정과 유족들에게 전달되면, 누구도 이것이 대필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완벽하게 세탁된 진실 앞에서 안도하며 눈물을 흘릴 터였다.


나는 인쇄 버튼을 눌렀다. 서재 구석에 있던 프린터가 고통스러운 기계음을 내며 하얀 종이를 뱉어냈다. 방금 막 인쇄된 종이에서는 따뜻하면서도 비릿한 잉크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것을 대봉투에 담고 봉인했다. 또 하나의 데드 마스크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4. 잉크가 마른 서사의 끝에서


작업이 끝나자 극도의 피로가 밀려왔지만, 뇌는 여전히 각성 상태였다. 타인의 삶을 마감해 주고 난 뒤에 찾아오는 이 서늘한 고독감은 어떤 처방약으로도 다스려지지 않았다. 나는 모니터를 끄고 방안을 어둠 속에 빠뜨렸다.


창밖으로 마포대교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은은하게 흘러들었다. 저 불빛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자신만의 문장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이나 내 방의 문을 두드리게 될까.


나는 서재의 커튼을 걷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내가 대필해 주었던 수많은 자살자들의 표정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 깊게 패인 미간, 그리고 굳게 닫힌 입술. 어쩌면 나는 그들의 유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밤 조금씩 나 자신의 유서를 나누어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채우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썼던 문장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나를 괴롭혔다. 내 삶에는 정작 나만의 문체가 없었다. 나는 그저 타인의 서사를 채워주는 유령,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사막을 떠도는 대필가일 뿐이었다.


밤은 깊어갔고,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내 방 안의 모든 잉크 냄새를 지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끝에 남아 있는 타인의 고독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일이면 또 다른 죽음의 데이터가 내 서재로 배달될 것이고, 나는 또다시 그들의 비명을 정갈한 활자로 번역하는 기계가 되어야 했다.


그 지독한 불면의 늪 속에서, 나는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것은 임시로 찍히는 쉼표 같은 잠이었다. 내 인생의 진짜 마침표가 어디서,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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