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문 앞에 왔다

by산들강바람

계곡의 바람이 시원하다.

볼을 스치는 그 서늘함이 예사롭지 않다. 봄바람과는 결이 다르다. 봄바람이 살며시 손을 잡아 이끄는 바람이라면, 이 바람은 좀 더 당당하다. 주저함이 없고, 망설임이 없다. 계곡 깊은 곳에서 차오른 냉기를 가득 안고 달려와, 거침없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이 바람이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은, 여름이 이제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계곡물소리가 졸졸졸 흘러온다. 물소리는 언제 들어도 말이 많다. 저 위 어딘가에서 바위를 넘고, 돌을 굴리고, 나무뿌리를 타고 내려오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함께 흘러가는 것 같다. 복잡하게 뭉쳐 있던 것들이 물결을 따라 조금씩 풀어진다. 바람과 물소리가 함께 있는 이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자리인 것 같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준비하고 온다. 봄 내내 땅을 데우고, 나뭇잎을 키우고, 계곡물의 수위를 높이고, 그렇게 조용히 채비를 마친 다음에야 문 앞에 선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여름은 이미 한참 전부터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계곡 바람의 서늘함이 달라진 것을 느끼는 순간, 그제야 우리는 안다. 아, 네가 왔구나.


초록이 일제히 몸을 기울인다. 저마다의 크기로, 저마다의 방향으로 흔들리면서도 숲 전체가 하나의 물결처럼 넘실거린다. 그 초록의 물결 속에 서 있으면, 내가 숲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무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잠깐 속하는 느낌. 여름 문턱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물이 발치를 스친다. 차갑지 않다, 시원하다. 차가움과 시원함은 다른 것이다. 차가움은 움츠러들게 하지만, 시원함은 열리게 한다. 몸 안에 갇혀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은, 그런 시원함. 계곡물은 알고 있다.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래서 이렇게 딱 맞는 온도로 발을 적셔주는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파랗다. 봄 하늘보다 더 진하고, 더 높다. 구름 한 점이 천천히 흘러가고, 그 뒤를 햇살이 따라가며 잎 사이로 떨어진다. 따사하게, 그러나 따갑지 않게. 아직은 봄의 온기를 조금 간직한 햇살이다. 이 햇살도 곧 달라질 것이다. 한 달쯤 지나면 이 자리에 쏟아지는 햇살은 이보다 훨씬 강렬해질 것이고, 계곡의 이 서늘한 바람이 그 뜨거움을 식혀줄 것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올 것이다.


아직 여름이 완전히 오기 전, 문 앞에 막 도착한 이 순간. 사람 소리 없이 물소리와 바람 소리만 있는 이 계곡. 초록이 가장 싱싱하고, 하늘이 가장 맑고, 바람이 가장 솔직한 이 계절의 경계.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이 사이에 서 있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을 충만하게 한다.


머리칼을 헝클어 놓고, 옷자락을 붙들고,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간다.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마 여름이 보낸 안부일 것이다. 나 곧 갈게, 준비하고 있어. 그런 말일 것이다.


자그락자그락, 발아래 작은 돌들이 반긴다. 계곡물이 졸졸졸 따라오고, 바람이 등을 밀어준다. 언덕을 오르면 저 너머로 마을이 보일 것이다. 지붕 위에 햇살이 내려앉아 있을 것이고, 마당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 풍경이 그리워, 걸음이 조금 빨라진다.

여름이 문 앞에 와 있다. 두드리기 전에, 잠깐 여기 서서 이 바람을 더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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