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강 회장에게 무기징역이, 최유진 박사와 박 형사에게는 각각 징역 20년과 15년이 선고되었다. 법정을 빠져나오는 길은 아수라장이었다.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는 더 이상 나를 '정의로운 목격자'로 비추지 않았다. '배신을 모의한 공범' 혹은 '타락한 증인'이라는 수식어가 내 뒤통수에 박혔다.
"이준호 씨! 강 회장과 거래하려 했던 게 사실입니까? 강민수 씨를 정말 친구라고 생각하긴 한 겁니까?"
쏟아지는 마이크 숲을 지나 나는 도망치듯 법원 뒷문으로 향했다. 승소했지만, 승리한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진실을 세상에 드러낸 대가는 달콤한 보상이 아니라,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수치심의 낙인이었다.
마포의 자취방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나는 모든 외부 연락을 차단한 채 방 안에 틀어박혔다. 웹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는 사실상 끝났다. 내 이름은 이미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내가 만든 사이트들은 '살인 공모자가 만든 페이지'라는 비난을 받으며 하나둘씩 폐쇄되었다.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다시 한번 '블랙아웃' 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저지른 선택의 결과였다.
나는 바카라상 위에 놓인 다영의 칫솔과 화장품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판 직후 종적을 감췄다. 그녀 역시 복수를 완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이용하고 기억을 조작했다는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구원이자 재앙이었다.
현관 도어록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번호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다영이었다. 그녀는 짐을 챙기러 온 듯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갈 곳은 정했어?"
내 물음에 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예전의 간호사 코스프레를 하던 시절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남해 쪽으로 내려가려고. 거기 노 씨 아저씨(목격자)가 계시거든. 민수 유골도 그 근처 선산에 모셨어."
그녀는 내 바카라상 위에 놓인 미러리스 카메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준호야, 넌 왜 법정에서 그 카드까지 공개했어? 그것만 없었으면 넌 완벽한 피해자로 남을 수 있었잖아."
"가짜 기억 속에 사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니까. 최 박사가 심어준 가짜 기억이든, 내가 만든 가짜 영웅담이든... 결국 내 인생을 갉아먹는 건 똑같더라고."
다영은 대답 대신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3장 약국 앞에서 느꼈던 그 차가운 떨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제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피로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이건 돌려줄게. 네가 사고 당일 찍었던 사진들, 경찰에서 돌려받았어."
다영이 내민 봉투 안에는 인화된 사진 몇 장이 들어있었다. 사고 직전, 내가 강민수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술자리. 그리고 비 내리는 한강 공원에서 우리가 함께 찍었던 마지막 셀카.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었다. 강민수의 어깨동무를 받으며, 곧 그를 배신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인간은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가.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칼날을 렌즈는 포착하지 못했다.
"준호야,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날 이용했던 민수도, 너도... 그리고 나 자신도."
다영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15장으로 가는 마지막 예고편 같았다. 이제 이 방에는 지워진 72시간의 기억 대신,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기억의 빚'만이 남았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렌즈 너머로 비어 있는 다영의 자리를 조용히 프레임에 담았다. 셔터 소리가 적막한 방안을 울렸다. 이제야 비로소, 내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챕터가 렌더링을 마치고 종료 버튼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으로부터 1년이 흘렀다. 마포의 화려한 야경이 내려다보이던 원룸 대신, 나는 이름조차 생소한 남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듀얼 모니터와 고성능 서버가 차지했던 바카라상 위에는 이제 낡은 인화기와 현상액 통들이 놓여 있다.
나는 더 이상 웹사이트를 디자인하지 않는다. 0과 1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는 너무나 쉽게 조작되고 삭제되었다. 대신 나는 빛과 어둠이 물리적으로 새겨지는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수정할 수 없고, 필터로 감출 수 없는 기록들. 그것만이 내 죄바카라감을 달래주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그저 서울에서 내려온 '사진 찍는 청년'으로만 알았다. '배신자 증인' 이준호의 기록은 인터넷의 깊은 바닷속으로 침잠했고, 나는 그 적막함 속에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어느 날, 이삿짐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강민수의 레코더를 다시 꺼냈다. 수천 번도 더 들었던 음성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기기 뒷면의 일련번호가 눈에 밟혔다.
'ID: 0315-FRIEND'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예전에 그와 함께 구축했던 유령 사이트의 관리자 페이지에 그 코드를 입력해 보았다. 1년 동안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숨겨진 디렉터리 하나가 열렸다. 그 안에는 문서가 아닌, 짧은 영상 편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준호야, 만약 네가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넌 아마 네 죄바카라감에 짓눌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날 배신하려 했던 그 밤, 사실 난 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원망하지 않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옥에서 살고 있으니까."
영상 속 민수는 한강의 노을을 배경으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네 기억 속에 남기고 싶었던 건 내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꿈꿨던 그 무모한 정의였어. 네 픽셀 속에 숨겨둔 건 장부만이 아니야. 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진짜 인생'의 백업본이지. 이제 그만 셔터를 눌러, 준호야. 넌 충분히 증언했어."
영상이 끝나고 화면은 검게 변했다. 민수는 죽기 전, 나를 용서하고 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기도 전에 말이다.
마을 포구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노란 우비를 챙겨 입으려다 멈췄다. 더 이상 노란 우비는 공포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지키려 했던, 혹은 누군가에게 지켜지려 했던 우리들의 서툰 흔적일 뿐이었다.
포구 끝에 낯익은 인영이 서 있었다. 다영이었다. 그녀는 근처 요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여전히 민수의 묘소를 돌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먼발치에서 서로를 확인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72시간의 통증이 되살아나기 때문이었다.
다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녀는 아주 짧게 목례를 하고는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찰나, 나는 카메라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찍었다.
암실 속에서 붉은 전등을 켜고 방금 찍은 사진을 현상액에 담갔다. 하얀 인화지 위로 형상이 서서히 떠올랐다. 비 내리는 포구, 안개 낀 바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한 사람.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배신자였든 영웅이었든, 그 순간 그곳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선명한 은염(銀鹽) 입자로 남는다.
나는 인화지 구석에 작게 날짜를 적어 넣었다.
'2025년 5월 6일. 새로운 프레임의 시작.'
나는 이제 꿈에서 비명을 지르며 깨지 않는다. 잃어버린 72시간은 더 이상 내 인생의 구멍이 아니라, 내가 채워나가야 할 새로운 앨범의 첫 페이지가 되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 문을 열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나는 이제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의 증인'이었고, 이제는 '오늘의 기록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날의 증인』이 완결되었습니다. 기억상실이라는 고전적인 소재를 현대적인 디지털 감각과 배신이라는 인간적 결함으로 풀어내려 노력했습니다. 독자분들이 주인공 준호의 비겁함과 용기에 함께 공감하며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준호의 험난한 여정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