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깃줄 위 참새 한 마리

수필

by산들강바람

전깃줄 위에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냥 거기 있다. 발가락 두 개로 가느다란 줄을 꼭 쥐고서,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저렇게 작은 몸으로 저렇게 큰 하늘 아래 앉아 있는 것이,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태연하다고 해야 할지. 한참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참새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 한 번 기울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린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작고 귀여운지, 웃음이 먼저 나온다. 저 작은 고개 하나가 품은 생각이 얼마나 될까. 오늘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서 잠을 잘 것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저기 앉아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고,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다. 그래서인지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바람이 지나간다.

전깃줄이 가늘게 흔들리고, 참새도 따라 흔들린다. 그런데도 떨어지지 않는다. 발가락 두 개의 힘이 저렇게 세다니. 흔들리면서도 꼭 붙어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참새가 세상을 사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면 같이 흔들리되, 줄만은 놓지 않는 것. 거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너지지도 않고, 바람의 리듬에 몸을 맡기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짹, 하고 짧게 운다.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그냥 한마디 내뱉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건네는 인사인지. 짹, 소리 하나가 허공으로 퍼져나가다 바람에 실려 멀어진다. 그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잠깐 고요가 내려앉는다. 참새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잠깐 조용하게 만든 셈이다. 작은 것들이 때로 이렇게 큰 고요를 남긴다.

참새를 보고 있으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어릴 적 마당 처마 밑에 둥지를 틀던 참새 가족. 어미가 먹이를 물고 날아오면 새끼들이 입을 쩍쩍 벌리며 조르던 소리, 삐약삐약. 아침마다 그 소리에 눈이 떠지던 날들. 이불속에서 눈도 채 뜨지 않은 채, 그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해가 떴구나 알았던 아침들. 지금은 그 마당도 없고, 그 처마도 없고, 그 소리도 없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에 꼽으려면 손가락이 모자란다. 그런데 참새는 여전히 저렇게 있다. 전깃줄 위에, 담벼락 위에, 골목 어귀에, 텃밭 울타리 위에. 변한 것은 세상이지, 참새가 아니다. 그 변하지 않음이 오히려 그리움을 건드린다.

어린 시절 골목은 참새들의 것이었다.

자그락자그락 자갈길을 걸으면 담장 위에서 짹짹거리며 달아나던 참새들. 빈 논에서 떼 지어 내려앉아 낟알을 쪼아 먹다가,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일제히 날아오르던 광경. 그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오를 때 나던 소리, 파닥파닥 파닥, 바람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 같은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하늘을 새카맣게 수놓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던 그 무리. 어린 나는 그것이 그저 신기하고 좋아서, 괜히 논두렁을 달려가며 참새를 날려 보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새들에게는 민폐였을 테지만.

다시 바라보니 참새가 나를 본다.

까만 눈이 작고 반짝인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저 눈에는 욕심이 없다.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 이 전깃줄 위, 이 바람 속, 이 햇살 아래가 전부인 눈빛. 그 눈빛 앞에서 나는 잠깐 부끄러워진다. 나는 얼마나 많은 어제와 내일을 붙들고, 지금 이 자리를 놓치며 살고 있는가. 지나간 것을 붙들고 아파하고, 오지 않은 것을 붙들고 두려워하는 사이, 오늘 이 골목의 햇살이, 이 바람이, 이 참새 한 마리가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닌가.

따사한 햇살이 전깃줄 위로 내려앉는다.

참새의 작은 등에 햇빛이 올라타는 것이 보인다. 참새는 개의치 않는다. 햇빛이 등을 두드려도, 바람이 깃털을 뒤집어도, 그냥 거기 앉아 있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는 것은 오는 대로, 가는 것은 가는 대로. 저항하지 않으니 힘이 들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몸을 낮추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참새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 같다.

짹짹짹,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운다.

무언가 할 말이 생긴 모양이다. 골목 저쪽에서 다른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같은 전깃줄에 내려앉는다. 둘이 나란히 앉아 짹짹짹, 짹짹, 짹,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신나게 나누는지. 이른 아침 마실 나온 동네 어른들처럼, 별것 아닌 이야기를 별것인 듯 나누다가,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자 둘 다 날개를 펼친다. 순식간이다. 펼쳤다 싶으면 이미 날아가고 있다. 작은 날갯짓이 빠르게 허공을 두드리며, 두 마리는 골목 끝 커다란 나무 쪽으로 사라진다.

전깃줄만 가늘게 흔들리다 이내 멈춘다.

한동안 빈 전깃줄을 바라본다. 참새들이 앉아 있던 그 자리가 이상하게 눈에 남는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던 것처럼 느껴진다. 작은 것 하나가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왜 이렇게 허전한가. 사람도 그렇다. 있을 때는 당연하고, 떠나고 나면 그제야 그 자리가 보인다. 늘 곁에 있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된다. 참새 한 마리에게 그것을 배우다니.

골목 끝 나무에서 짹짹, 소리가 들린다.

아직 멀리 가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쪽을 향해 걷는다. 자그락자그락, 골목의 자갈이 발아래서 반긴다. 발걸음이 조금 가볍다. 저 나무 아래 서면, 참새들이 또 짹 하고 인사를 건네줄지도 모른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햇살이 잎 사이로 쏟아지고, 그 아래 내가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위 어딘가에, 전깃줄 한 칸쯤의 크기로, 참새 한 마리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오늘 하루를 조금 다르게 만들어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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