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허망(虛妄)의 뒤편에 남은 불멸(不滅)의

수필

by산들강바람

경주를 벗어나 동해안을 향해 달리는 길, 내비게이션의 지시가 잦아들 무렵 확 트인 벌판 너머로 두 개의 거대한 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감은사지(感恩寺址). 이제는 법당도, 스님들의 독경 소리도 사라지고 텅 빈 절터만이 남았지만, 그곳을 지키는 동·서 삼층석탑은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답사객을 맞이한다. 나는 오늘, 그 옛 탑의 그림자 아래서 허망하게 흘러가는 세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래지 않는 영원한 화려함을 동시에 만났다.


탑 아래 서서 고개를 들어 거대한 돌덩이들을 바라보았다. 천 수백 년의 시간이 이 돌들 위에 남긴 흔적은 역력했다. 비바람에 깎여 모서리는 둥글어졌고, 표면은 거칠게 마모되었으며, 여기저기 이끼와 세월의 때가 거뭇하게 묻어 있었다. 한때는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 기백 넘치던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려한 단청과 장엄한 불상으로 가득 찼을 대가람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남은 것은 텅 빈 터와 낡고 투박해진 두 기의 석탑뿐이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세월의 이길 수 없는 무게와, 무정한 시간 앞에 결국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인생의 허망함을 보았다. "그토록 찬란했던 신라의 영광도, 대왕의 간절했던 호국의 염원도 결국은 이 거친 돌탑 두 개만을 남기고 사라졌구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허망함에 젖어 잠시 눈을 감고, 그 옛날 감은사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을 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단순히 '낡은 돌탑'으로만 보였던 탑들이, 상상 속에서 수천 개의 금박과 찬란한 오색단청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웅전 앞마당에 나란히 선 두 탑은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고, 그 주위로 수많은 승려들이 예불을 드리는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금당 지하로 물길을 내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수중릉과 연결했다는 전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절 신라인들의 간절한 신앙과 뛰어난 건축 기술이 결합한 역동적인 삶의 현장이었다. 그 상상 속의 풍경은 눈앞의 황량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보다 화려하고 생생한 '화려함' 그 자체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탑은 더 이상 허망함의 상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세월의 허망함을 뚫고 살아남은, '진정한 화려함'의 증거였다. 육체는 사라지고, 목조 건물은 불타 없어졌지만, 그 시절 신라인들이 가졌던 숭고한 정신과 기술, 그리고 염원은 이 단단한 화강암 속에 고스란히 봉인되어 있었다. 마모된 표면은 낡음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을 견뎌낸 훈장이었고, 투박한 실루엣은 화려한 장식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불멸의 아름다움이었다. 세월은 화려한 겉모습을 가져갔지만, 그 속에 담긴 영혼의 화려함은 결코 가져가지 못했다.


감은사지를 떠나며 나는 깨달았다. 세월의 허망함은 피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에 쏟은 열정과 정신은 결코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낡은 탑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무상함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빛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에 대한 찬가였다. 오늘 내가 만난 감은사지의 옛 탑은, 허망의 뒤편에서 피어나는 가장 찬란한 불멸의 화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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