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10장: 숨 막히는 추격 (Suffocation)
빗물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채 내가 스며든 곳은 종로 낙원상가 인근의 한 오래된 하드웨어 수리점 지하 작업실이었다. 과거 프리랜서 작업을 하며 알게 된 노신사의 공간. 새벽 4시, 주인 없는 작업실의 고요한 공기가 내 거친 숨소리를 집어삼켰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영이 준 레코더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강민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준호 씨, 당신이 이 녹음을 듣고 있다면 나는 이미 세상에 없겠지. 하지만 우리가 만든 '프로젝트 유령'은 살아있어야 해. 기억해. 진실은 가장 화려한 픽셀 뒤에 숨겨져 있어. 비밀번호는 네가 가장 증오하는 그날의 '에러 코드'다."
에러 코드. 나는 홀린 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사고 직전, 내가 작업하던 웹사이트의 소스 코드를 훑어내려갔다. 겉보기엔 평범한 쇼핑몰 사이트였지만, 이미지 파일의 바이너리 데이터(Binary Data) 속에 거대한 기밀문서들을 쪼개어 숨겨놓은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 기법이었다.
비밀번호 입력창에 나는 그 숫자를 입력했다. '0315'.
엔터.
화면 가득 강 회장의 비자금 장부와 정·관계 로비 명단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내 스마트폰이 비명을 지르며 진동했다.
발신인은 박 형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전화를 거부하려 했지만, 뒤이어 날아온 영상 메시지 하나가 내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영상의 배경은 요양원 옥상이었다. 거센 빗속에서 다영이 난간 끝에 위태롭게 묶여 있었다. 그녀의 입은 테이프로 막혀 있었고, 얼굴은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박 형사가 카메라를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총구를 다영의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준호야, 숨바꼭질은 여기까지 하자. 30분 준다. 강민수의 레코더와 데이터를 가지고 한강 대교 남단 하수처리장으로 와. 1분이라도 늦으면 이 여자는 20년 전 강민수가 떨어졌던 그 차가운 물로 똑같이 보내줄 테니까."
숨이 막혔다. 'Suffocation'. 박 형사는 단순히 나를 쫓는 것이 아니라 내 폐부를 직접 조여 오고 있었다. 나는 방금 복구한 장부 파일과 박 형사의 살인 증거 영상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이걸 세상에 터뜨리면 박 형사는 파멸한다. 하지만... 다영이는 죽는다.'
나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시야를 가로막았다. 택시도 잡히지 않는 새벽길, 나는 버려진 전동 킥보드에 몸을 싣고 한강을 향해 질주했다.
머릿속에서는 최 박사가 주입한 가짜 기억과 레코더 속 강민수의 목소리가 뒤섞여 소음을 만들어냈다.
"넌 살인마야."
"아니, 넌 설계자야."
두 개의 인격이 내 안에서 충돌하며 뇌압이 상승했다. 시야 가장자리가 붉게 타올랐다. 약 기운이 떨어지며 금단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지가 떨리고 숨이 가빠왔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내 기억의 마지막 페이지를 내 손으로 적어 넣어야 했다.
하수처리장에 도착했을 때, 검은색 차량 서너 대가 라이트를 켜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형사는 다영의 머리채를 잡은 채 차 보닛 위에 서 있었다.
"데이터는?"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높이 들었다.
"다영이부터 풀어줘. 그럼 패스워드를 알려주지."
"너 지금 거래할 처지라고 생각하나 본데..."
박 형사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어둠 속에서 저격수들의 레이저 조준점이 내 가슴팍에 점을 찍었다. 붉은 점들이 내 옷 위에서 기괴한 춤을 췄다.
"준호야... 오지 마! 그냥 다 터뜨려!"
테이프를 뜯어낸 다영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박 형사의 구두 굽이 그녀의 손등을 짓눌렀다.
"자, 선택해라 이준호. 진실을 세상에 뿌리고 이 여자 시체를 챙길 건지, 아니면 입 닫고 둘이 같이 지옥으로 갈 건지."
나는 노트북의 '전송'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클릭 한 번이면 강 회장의 제국은 무너진다. 하지만 박 형사의 방아쇠가 더 빠를 것이다.
그때, 내 스마트워치에서 알림이 울렸다. 7장에서 내가 설정해 두었던 **'예약 전송'**의 카운트다운이었다.
[00:05... 04... 03...]
나는 박 형사를 보며 마지막 도박의 미소를 지었다.
"박 형사님, 웹 디자이너는 말이죠. 언제나 '백업'을 만듭니다. 당신이 날 쏘는 순간, 이 모든 데이터는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 메일함으로 자동 전송되게 되어 있어. 날 살려두는 게 당신 상전인 강 회장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야."
폭풍전야의 정적. 박 형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2막의 절정,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만든 디지털 감옥에 적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제11장: 기억의 폭발 (Memory Burst)
[00:01... 00:00]
예약 전송의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내 스마트워치에서 짧은 진동이 울림과 동시에, 작업실 서버에 대기 중이던 수백 개의 패킷이 전 세계 언론사와 수사기관의 메일 서버로 흩어졌다.
"이 자식이 진짜...!"
박 형사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그의 무전기에서 날카로운 비명 섞인 교신이 터져 나왔다.
"반장님! 지금 인터넷에... 강 회장님 비자금 장부랑 반장님 목소리 녹취록이 다 퍼졌습니다! 실시간 검색어 1위예요! 당장 철수해야 합니다!"
박 형사의 총구가 미세하게 떨렸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내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밀려왔다.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억눌렸던 신경 세포들이 일제히 발화하며 지워졌던 픽셀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한강 대교 하부 도로의 그날 밤이 완벽하게 재생되었다.
비가 쏟아지던 현장. 나는 강민수의 시신 곁에 웅크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박 형사가 아니라, 내 차 뒷좌석에 숨어있던 누군가로부터.
사고 직전, 내 차의 자율 주행 시스템이 갑자기 먹통이 되었던 이유가 떠올랐다. 누군가 원격으로 내 차를 해킹했다. 나는 핸들을 조작하려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차는 벽을 향해 돌진했다. 에어백이 터지고 의식이 흐릿해지는 찰나, 차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박 형사가 아니었다.
그는 하얀 가운 대신 노란 우비를 입고 있었다. 그는 내 목에 주삿바늘을 꽂으며 속삭였다.
"준호 씨, 훌륭한 시나리오예요. 당신은 이제부터 강민수를 죽인 미치광이가 되는 겁니다. 당신의 그 뛰어난 기억력이 독이 될 줄은 몰랐죠?"
그 목소리. 최유진 박사였다.
"아아악!"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박 형사가 당황하며 나에게 다가오려 할 때, 어둠 속에서 차가운 엔진 소리와 함께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최유진 박사였다.
"박 형사, 멍청하게 뭐 하는 거야? 데이터가 퍼졌으면 이놈부터 조용히 시켰어야지."
최 박사의 등장에 박 형사가 오히려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피눈물이 고인 눈으로 최 박사를 노려보았다.
"박사님... 당신이었어. 처음부터 내 기억을 지운 게 아니라, '조작'한 게 당신이었냐고!"
최 박사는 여유롭게 안경을 고쳐 썼다.
"조작이라니요, 준호 씨. 난 당신의 뇌에 '예술'을 한 겁니다. 당신은 강민수를 도우려던 게 아니라, 강 회장에게 장부를 팔아넘기려던 기회주의자였잖아요? 내가 그걸 살인마라는 좀 더 극적인 서사로 바꿔준 것뿐입니다."
그의 말에 내 안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강민수는 나를 믿었지만, 나는 그를 배신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배신의 현장에서 강 회장 측의 '청소부'인 최 박사에게 먼저 당했던 것이다. 나는 피해자도, 정의로운 설계자도 아니었다. 나 역시 욕망에 눈먼 죄인이었다.
"준호야, 아니야! 그 사람 말 믿지 마!"
인질로 잡혀있던 다영이 울부짖었다. 최 박사는 차갑게 비웃으며 주사기를 꺼냈다.
"준호 씨, 당신의 진짜 기억이 돌아왔으니 이제 이 연극도 끝내야겠네요. 이번엔 기억 상실이 아니라, 영원한 수면입니다."
최 박사가 다가오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가짜 기억 속의 '살인마 이준호'와 현실의 '배신자 이준호', 그리고 지금의 '도망자 이준호'가 하나로 합쳐지며 극도의 인지 과부하가 일어났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파이프를 휘둘러 최 박사의 주사기를 쳐냈다. 그리고 박 형사가 방심한 틈을 타 다영에게 달려갔다.
"다영아, 도망쳐! 내가 누군지 이제 상관없어. 이 진실만은 세상이 알아야 해!"
그때, 하수처리장 입구로 수십 대의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박 형사의 부하들이 아니라, 내 예약 전송 메일을 받고 출동한 본청 수사팀이었다.
"전원 투항해! 손 들어!"
박 형사와 최 박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나는 다영을 품에 안은 채 차가운 빗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내 머릿속의 블랙아웃은 끝났지만, 이제 내가 마주해야 할 진짜 지옥—내가 저지른 배신과 죄바카라감의 기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