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의 단단함과 그 무너짐을 위하여

수필

by산들강바람


비가 내린 다음 날 아침은 유독 투명하다. 창문을 열자, 밤새 비에 씻겨 내려간 어둠의 잔해 대신 묵직하고도 습한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습기는 불쾌하기보다는 오히려 간밤의 비가 땅의 모든 숨구멍을 씻겨냈다는 증거처럼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늘은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고, 그 투명한 파란색은 내 마음까지 투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습관처럼 포항의 골목을 지나 동빈내항을 거쳐 방파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산바카라길이었지만, 발바닥에 전해지는 감각이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며칠간 이어지던 건조함 때문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를 뿜어내던 푹신했던 흙길이, 오늘은 마치 누군가 정성스레 다져놓은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밤새 비에 젖었다가 이른 아침 햇살에 마르는 과정에서, 땅은 제 몸을 빈틈없이 조이고 표면을 매끄럽게 다져놓은 것이다. 그 단단함은 마치 어제의 비를 기억하고,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땅의 소리 없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그 단단한 지표면을 밟으며 걷다 보니, 불현듯 어릴 적 할머니가 종종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비 오고 나면 땅이 단단해진다네.” 어릴 때는 그 말씀이 그저 비에 젖은 흙이 마르면 딱딱해지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만 생각했다. 질척이던 흙탕물이 사라지고 신발에 흙이 묻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그 정도의 단순한 감상이었다. 그러나 삶의 겨울을 몇 번 겪고 난 지금, 포항의 방파제 위에서 마주한 땅의 단단함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넘어 훨씬 더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


단단해진 땅은 거부의 몸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다음 비를 기다리는, 가장 치열하고도 거룩한 준비였다. 비가 다시 내리면, 그 단단하던 표면은 수분을 머금고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겨울 내내 얼어붙고 다시 굳어지며 만들어낸 미세하고도 수많은 갈라진 틈 사이로, 물은 깊숙이 스며든다. 만약 땅이 항상 질척거리는 부드러움만을 고집했다면, 비는 그저 표면을 훑고 지나가거나 고여서 썩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땅은 제 몸을 단단하게 다짐으로써, 비를 온몸으로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완성한 것이다.


방파제 끝에 서서 포항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너머로 가을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고, 회색빛 테트라포드들이 거대한 이빨처럼 바다를 향해 정렬해 있었다. 테트라포드에 부딪히는 파도는 한 번도 쉬지 않는다. 밀려오고, 부서지고, 흩어지고, 다시 모여서 또다시 밀려온다. 그 단단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온몸을 던져 산산조각이 나면서도, 파도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 파도의 모습은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우리를 닮았다. 우리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세상이라는 단단한 벽에 부딪힌다. 상처받고 부서지지만, 다시 모여서 밀려간다. 비가 온 뒤 단단해진 땅처럼, 우리는 지난겨울의 시린 아픔과 상처를 견디며 마음의 껍질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것은 다시는 상처받지 않겠다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겠다는 보호막이다.


하지만 그 단단함이 영원할 때, 그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벽이 된다. 우리는 단단해진 땅이 비를 만나 부드럽게 물을 머금듯, 다시 부드러워져야만 한다. 파도가 부서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테트라포드를 향해 밀려오듯, 우리도 단단함을 풀고 세상을, 그리고 타인을 다시 온전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단단함은 거부가 아니라,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한 잠시의 멈춤이자 힘의 축적이었다.


어제 비가 온 뒤 오늘은 맑다. 땅은 단단하게 굳었고, 발바닥에는 그 단단함이 선명한 저항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맑음이 영원하지 않으며, 머지않아 다시 삶의 비가 올 것을. 그때 이 땅은 어제의 단단함을 기억하며, 동시에 오늘 머금은 햇살의 온기를 품고, 다시 부드럽게 물을 머금을 것이다. 그리고 갈라진 틈 사이로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지금 단단하게 굳어 있는 내 마음도,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위로, 혹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슬픔이라는 비가 다시 내릴 때, 기꺼이 부드럽게 풀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삶의 비를, 그 속에 담긴 축복과 슬픔을 피하지 않고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가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 나는 방파제 너머의 윤슬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단단해진 땅 위로, 내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았다. 그것은 어제의 비를 버텨냈다는 훈장이자, 곧 다시 부드러워질 땅에,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남을 것이다. 단단하게 굳어진 땅 위에서, 나는 다시 부드러워질 내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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