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6장: 금지된 기억 (The Forbidden)
빗줄기를 뚫고 도착한 곳은 홍대 근처의 허름한 지하 PC방이었다. 최첨단 고사양 PC들이 늘어선 화려한 입구 대신, 나는 구석진 자리에 놓인, 먼지 쌓인 낡은 단말기 앞에 앉았다. 다영의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스마트워치는 이미 지나가는 쓰레기차 적재함에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온몸이 비에 젖어 오한이 밀려왔지만, 떨리는 손으로 로그인을 시도했다. 내 본능이 가리키는 곳은 공개된 클라우드가 아니었다. 웹 디자이너로서 백업 용도로 몰래 운영하던 개인 서버, 일명 '다크룸(Darkroom)'이었다.
"제발... 그대로 있어라."
비밀번호는 내 사고 전 72시간 중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숫자의 조합이었다. 로그인이 성공하자, 3월 13일부터 15일까지의 타임라인이 모니터 위로 쏟아져 내렸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내 핸드폰의 GPS 로그였다. 다영은 사고 당일 우리가 드라이브를 했다고 했지만, 기록된 로그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3월 15일 21:00: 마포구 원룸 (이동 없음)
3월 15일 22:15: 강남구 최유진 정신건강의학과 지하 주차장
3월 15일 22:45: 한강 대교 하부 하수처리장
"최유진 박사의 병원...?"
사고 1시간 전, 나는 병원에 있었다. 그것도 진료 시간이 한참 지난밤에. 로그 기록을 더 깊게 파고들자 충격적인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 내가 내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원격으로 실행해 저장해 둔 음성 파일이었다. 파일명은 '유언. mp3'.
재생 버튼을 누르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익숙하지만 증오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준호 씨, 당신의 뇌는 참 흥미로운 구조예요. 최면과 약물에 이렇게 반응이 빠르다니. 이제 당신은 강민수를 죽인 기억을 갖게 될 겁니다. 그게 우리가 이 도시를 조용히 유지하는 방법이죠."
최유진 박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영의 흐느낌.
"박사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준호가 다 알게 되면요?"
"걱정 마요, 다영 씨. 당신이 곁에서 '가짜 기억'만 계속 주입해 준다면, 준호 씨는 평생 스스로를 살인마라고 믿으며 감옥에서 썩게 될 테니까."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영의 헌신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가짜 기억의 성벽을 보수하기 위한 '감시'였다. 최 박사는 내 기억상실을 이용해 강민수 살인사건의 진범을 나로 '프로그래밍'한 것이었다.
그때, 서버의 접속 알림이 떴다. [경고: 외부 IP에서 '다크룸'에 강제 접속 시도 중]
최 박사나 한 팀장 쪽에서 내 개인 서버를 찾아낸 것이 분명했다. 나는 급하게 데이터를 외장 하드로 옮기기 시작했다. 1%... 5%... 진행 바가 올라가는 속도가 심장 박동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동시에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눌러쓴 남자의 눈빛이 내 모니터와 내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이준호 씨, 맞지?"
남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노트북을 낚아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원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PC방의 뒷문을 발로 차고 골목으로 뛰어 나갔다. 등 뒤에서 "거기 서!"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단순히 지워진 기억이 아니었다. 최 박사가 내 뇌에 강제로 심어놓은 '가짜 기억'이라는 악성코드를 삭제하고, 그들이 은폐하려 했던 **'진짜 살인범의 얼굴'**을 찾아내야 했다.
내 가방 안에는 방금 복구한 파일 중 아직 열어보지 못한 영상 하나가 남아 있었다. 파일 생성 시각은 3월 15일 밤 11시 05분. 사고 직전, 내가 죽기 살기로 찍었던 마지막 프레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어두운 골목 끝, 낡은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마지막 영상을 실행했다.
화면 속에서 노란 우비를 입은 누군가가 강민수의 가슴에 칼을 꽂고 있었다. 범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빗물에 젖어 드러난 얼굴은 최유진 박사도, 한 팀장도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강민수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의 실세인 강 회장이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목격한 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었다. 부와 권력을 승계받기 위해 친자식을 도구로 쓴 괴물의 민낯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을 지키기 위해 최 박사와 다영은 나라는 무고한 희생양을 '조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에 툭, 하고 손이 얹어졌다.
"이제 다 봤나, 준호 씨?"
박철민 형사였다. 그의 손에는 수갑이 아닌, 장전된 권총이 들려 있었다.
좁은 공중전화 부스 안, 빗물로 뿌연 유리창 너머로 박철민 형사의 권총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빗줄기가 총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심장 소리가 부스 안을 가득 채운 기계음보다 더 크게 들렸다.
"박 형사님... 당신도 그들과 한패입니까?"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박 형사는 대답 대신 주변을 살폈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천천히 총을 내리더니 부스 문을 열고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비좁은 공간에 중년 남자의 눅눅한 담배 냄새와 긴장감이 들어찼다.
"이준호 씨, 지금 경찰 내부엔 널 도와줄 사람이 없어. 서장이 이미 널 '망상증이 있는 살인 용의자'로 수배 내렸으니까."
"그럼 왜 나를 쏘지 않았죠?"
"난 서장의 명령을 듣는 게 아니라, 내 파트너 강철수의 복수를 하러 온 거거든."
박 형사는 내 손에 든 외장 하드를 뺏듯 가져가 주머니에 넣었다.
"네가 본 영상, 강 회장의 얼굴이 나온 건 절반만 진실이야. 강 회장이 아들을 찌른 건 맞지만, 그 자리에 한 명 더 있었어. 현장을 지휘하고 청소한 사람. 그놈이 널 여기까지 몰아넣은 설계자다."
박 형사는 나를 자신의 낡은 승용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차는 사이렌 소리를 피해 어두운 강변 북로를 질주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강 대교 근처의 하수처리장 외곽이었다. 비바람에 꺾인 갈대들이 웅웅 거리며 울고 있는 황량한 곳.
"사고 당일, 네 GPS 로그가 여기서 끊겼지? 블랙박스도, 핸드폰 데이터도 다 조작됐지만... '기계'는 거짓말을 해도 '현장'은 거짓말을 안 해."
나는 진흙탕을 헤치며 강가로 다가갔다. 사고 당시의 파편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6장에서 확인한 영상 속, 내가 카메라를 휘두르며 저항하던 그 장소였다.
머릿속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몰려왔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누군가 내 목을 조르던 손길, 그리고 내가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던졌던 방향.
"저기예요. 하수구 배수관 안쪽."
나는 진흙 바닥을 기어 배수관 입구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촉감이 닿았다. 젖은 흙더미 속에서 끌어올린 것은, 진흙범벅이 된 내 **'진짜 미러리스 카메라'**였다.
박 형사는 라이트를 비추며 내 손에서 카메라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렌즈는 박살 났지만, 바디는 방수 하우징 덕분에 멀쩡해 보였다.
"이 안에 담긴 게 네 목숨줄이다. 한 팀장이 준 SD 카드는 가공된 'JPG'였겠지. 하지만 이 카메라 안엔 조작할 수 없는 'RAW' 파일이 들어있을 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배터리를 확인했다. 방전된 상태였다. 우리는 근처의 허름한 모텔로 스며들었다. 박 형사가 준비한 노트북에 카메라를 연결하고, 충전을 시작했다.
화면에 로딩 바가 떴다. 3월 15일 22시 58분. 사고 2분 전의 영상.
동영상이 재생되자, 나는 숨을 멈췄다.
영상 속에서 강 회장은 이미 현장을 떠난 뒤였다. 강민수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나는 공포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노란 우비를 입은 누군가가 강민수의 숨통을 확인하듯 다가왔다.
범인이 노란 우비의 모자를 벗었다. 화면 가득 드러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건 다영이 아니었다. 최유진 박사도 아니었다. 화면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사람은, 지금 내 옆에서 권총을 만지고 있는 박철민 형사였다.
"기억났나 보네, 준호 씨."
노트북 화면의 푸른빛을 받은 박 형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미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강 회장은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어했지. 그래서 내가 마무리했어. 넌 그 장면을 찍어버린 재수 없는 목격자였을 뿐이고. 다영이와 최 박사는 널 미치광이로 만들어서 살려두려 했지만... 난 그게 좀 불안했거든."
박 형사는 노트북의 전원을 뽑아 가방에 챙겼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어. 넌 오늘 여기서 강민수를 죽인 죄바카라감에 자살한 용의자가 되는 거야. 유서도 이미 다영이 글씨를 따서 써놨지."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좁은 모텔방 안, 도망갈 곳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노트북 화면 아래에 떠 있는 작은 알림 창.
[업로드 완료: Google Drive - '72시간_원본_파일']
내가 PC방에서 설정해 둔 자동 동기화 프로그램이, 박 형사가 전원을 뽑기 직전 마지막 데이터를 서버로 쏘아 올린 것이다.
"박 형사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나는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실시간 방송 송출 중'**이라는 빨간 글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지금 당신의 고백, 천 명이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