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증언

소설

by산들강바람

제4장: 숨겨진 단서 (Hidden Data)


1. 1분의 틈새


"준호야, 나 잠깐 밑에 분리수거 좀 하고 올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누워 있어."


다영의 목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닫혔다.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침대에서 튕겨 나갔다. 다영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길어야 3분. 나는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맨발로 운동화만 구겨 신고 집을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택했다. 8층에서 1층까지 단숨에 내려오는 동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1층 공동현관 유리문 너머로 분리수거장에 서 있는 다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이용해 건물 뒤편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2. 편의점 뒤, 비릿한 그림자


약속 장소인 편의점 뒤쪽 골목. 젖은 박스 더미와 담배 연기가 뒤섞인 냄새 속에 검은색 세단이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내린 남자는 강민수 회장의 비서, 한 팀장이었다.


"이준호 씨, 제법이군. 그 감시를 뚫고 나오다니."


그는 주머니에서 SD 카드가 담긴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 손바닥에 거칠게 쥐여주었다.


"이 안에 당신이 3월 15일에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당신의 연인 김다영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다 들어있어. 확인하고 나면 연락해.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3. 위치 추적의 함정


한 팀장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골목. 나는 카드를 꽉 쥐고 숨을 고르려는데,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강렬하게 진동했다.


[가족 공유 위치 알림: '김다영'님이 당신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아차. 사고 후 다영이 '내 안전을 위해' 설정해 둔 위치 공유 기능을 끄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내가 집을 나갔다는 것과, 지금 이 골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당황해서 워치를 풀려했지만, 골목 입구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골목 끝 가로등 불빛 아래, 노란 우비를 입은 다영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분리수거하려던 쓰레기봉투 대신, 내 방 서재에 있던 날카로운 커터칼이 쥐여 있었다.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준호야, 약 먹어야 할 시간인데 왜 여기 있어?"


다정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일정한 톤. 나는 뒷걸음질 치다 막다른 골목의 벽에 부딪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녀는 이미 내 '탈출'을 '반역'으로 간주한 듯했다.


4. 데이터의 폭주


나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무인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다영이 유리문 밖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덜컥.


"준호야, 문 열어. 비 맞으면 머리 아프잖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의점 내부에 비치된 공용 노트북을 켰다. SD 카드를 슬롯에 꽂았다. 파일들이 나타났다. 3월 15일 밤의 기록들.


동영상 파일을 클릭하자, 빗속의 한강 둔치가 나타났다. 화면 속의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를 향해 카메라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저 여자가 밀었다고!"


카메라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각도가 꺾였다. 화면 하단에 찍힌 범인의 신발. 그것은 다영의 구두가 아니었다. 3장 병원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최유진 박사'의 구두였다.


그리고 화면 구석, 쓰러진 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다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가해자가 아니라, 나를 살리려던 목격자였나?


혼란이 극에 달한 순간, 유리문 밖의 다영이 스마트폰을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 속에는 **내가 아닌 또 다른 '이준호'**가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준호야, 넌 네가 누군지 몰라. 네 안의 괴물이 그 사람을 죽인 거야. 난 널 지키려고 그 기억을 지웠던 거고."


다영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편의점 안에 울려 퍼졌다. 1막의 마지막, 나는 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혼돈 속에 던져졌다.


제5장: 첫 번째 충돌 (The First Impact)


1. 유리벽 너머의 가스라이팅


"준호야, 제발 문 열어. 너 지금 혼란스러운 거 알아. 약을 안 먹어서 뇌가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야."


무인 편의점의 강화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영이 속삭였다. 빗물에 젖은 그녀의 노란 우비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번뜩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커터칼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지만, 대신 그녀는 내 마음을 난도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노트북 화면 속 '또 다른 나'와 유리문 밖의 다영을 번갈아 보았다. 화면 속의 나는 짐승 같은 눈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고, 내 앞의 다영은 성녀 같은 표정으로 나를 회유하고 있었다.


"가짜 기억? 그럼 이 영상은 뭔데? 한 팀장이 왜 나한테 이걸 준 거냐고!"


"한 팀장? 그 사람은 강민수 회장의 비서가 아니야. 서장 쪽 사람이야. 널 이용해서 진실을 세탁하려는 괴물이라고!"


다영이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쾅, 쾅. 평소의 단아함은 온데간데없는, 절박함이 섞인 소음이었다.


"그 영상, 딥페이크(Deepfake)야. 네 얼굴을 합성해서 네가 범인이라고 믿게 만들려는 거야. 그래야 네가 자수하고 사건이 종결될 테니까. 준호야, 나만 믿어. 내가 널 위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2. 픽셀의 배신


나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딥페이크? 2040 세대에게 그것은 낯선 기술이 아니다. 하지만 영상 속의 근육 움직임, 비에 젖은 머리카락의 질감,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고통스러울 때만 나타나는 왼쪽 눈가의 미세한 경련까지 똑같았다.


'이게 정말 가짜일 수 있을까? 아니면... 내 안의 내가 정말 저 일을 저지른 걸까?'


혼란이 정점에 달했을 때, 편의점 내부의 스피커에서 치익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한 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편의점 CCTV 망을 해킹한 듯했다.


"이준호 씨, 다영의 말을 믿지 마. 그녀는 당신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당신을 '완벽한 범인'으로 조립하고 있는 중이야. 당신이 기억을 못 할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말이지."


유리문 밖의 다영과 스피커 속의 한 팀장. 두 개의 진실이 나를 양쪽에서 잡아당겼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72시간의 공백은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라, 누군가 내 뇌에 설치한 시한폭탄이었다.


3. 충돌 (Impact)


그때, 편의점 앞 도로에 급정거하는 타이어 마찰음이 들렸다. 라이트 불빛이 쏟아지며 다영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검은색 밴 세 대가 편의점을 포위하듯 멈춰 섰다.


"준호야, 도망쳐!"


다영이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봤다. 밴에서 내린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다영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들은 다영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히 편의점 안에 고립된 '나'와 내 손에 든 'SD 카드'였다.


챙그랑!


요원 중 한 명이 쇠파이프로 편의점 유리문을 박살 냈다. 유리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고, 나는 노트북을 품에 안고 창고 쪽으로 몸을 날렸다.


"카드 내놔!"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진열대에 놓인 뜨거운 온음료 캔들을 무차별적으로 던지며 저항했다. 하지만 수적 열세였다. 한 사내가 내 목을 졸라 벽으로 밀어붙였을 때, 밖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4. 붉은 우비의 개입


"내 환자한테 손 떼."


차가운 목소리. 빗속에서 나타난 인물은 뜻밖에도 정신과 의사 최유진이었다. 그는 평소의 젠틀한 모습과는 달리, 손에 전기 충격기를 들고 요원 중 한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박사님...?"


다영이 바닥에서 일어나 최 박사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최 박사는 다영을 차갑게 밀쳐냈다.


"다영 씨, 넌 너무 감정적이었어. 준호를 설득하라고 했지, 이렇게 노출되라고 한 적 없어."


최 박사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부서진 유리 조각을 밟는 그의 구두 소리가 3장에서 확인한 영상 속 범인의 발소리와 겹쳐 들렸다. 그는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준호 씨, 기억은 찾지 못하게 방해하는 게 아니라, **'새로 써넣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강민수를 죽인 죄바카라감에 시달리다, 이 편의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겁니다. 그게 우리가 준비한 마지막 페이지예요."


최 박사가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푸른색 액체가 담긴, 아까 보았던 그 약의 고농축 버전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옆에 있던 소화기를 들어 안전핀을 뽑았다. 하얀 분말이 편의점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나는 부서진 문을 향해 뛰었다.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는지, 아니면 소화기가 터지는 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빗속으로 뛰어든 나는 무작정 달렸다. 뒤에서는 다영의 절규와 최 박사의 차가운 명령이 뒤섞여 들려왔다. 1막이 끝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믿었던 연인은 나를 감시하던 '간수'였고, 나를 치료하던 의사는 나를 지우려는 '살인마'였으며, 나는... 어쩌면 정말로 누군가를 죽인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빗물에 젖은 SD 카드를 입에 물고, 나를 지워버리려는 세상의 포위망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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