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준호 씨, 뇌는 정교한 하드웨어와 같아요. 충격을 받으면 에러 섹터를 격리하고 복구할 시간이 필요하죠. 억지로 파일을 열려고 하면 시스템 자체가 깨질 수 있습니다."
강남의 화려한 통유리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최유진 박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은은한 디퓨저 향기. 하지만 나에게 이곳은 세상을 차단한 거대한 서버실처럼 느껴졌다. 최 박사는 내 PTSD가 심각하다며, 기억 회복을 돕는 '인지 강화제'를 처방했다고 했다.
진료가 끝나고 1층 약국으로 내려갔다. 다영은 나를 대기석에 앉혀두고 능숙하게 처방전을 제출했다. 요즘 약국은 예전 같지 않았다. 약사가 약봉투를 건네며 태블릿 PC를 돌려 다영에게 무언가를 상세히 설명했다. 다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메모를 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준호야, 가자. 약 잘 지어왔어."
다영이 내민 약봉투는 묵직했다. 봉투 뒷면에는 내가 평소 웹 UI를 디자인할 때나 보던 깔끔한 그리드 레이아웃으로 **'복약 안내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무릎 위에 놓인 약봉투를 가만히 훑었다. 요즘 약국 봉투는 친절했다. 내가 먹을 알약의 실제 사진과 이름, 그리고 효능이 한눈에 들어오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침/저녁 식후 30분]
알약 사진: 푸른색 원형 (각인: XP-21)
약명: 제나팜 정 0.5mg
효능: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및 인지 기능 개선 도움
글자만 보면 완벽했다. 하지만 내 눈은 직업적으로 '행간'과 '여백'을 읽는 데 익숙했다. 다영이 주차를 하느라 한눈을 파는 사이, 나는 봉투 하단에 인쇄된 작은 QR 코드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갖다 댔다.
띠링-
화면에 뜬 상세 복약 지도 페이지. 하지만 약국에서 인쇄해 준 요약본과는 내용이 미묘하게 달랐다. 스크롤을 내리던 내 손가락이 멈췄다.
[심층 정보 - 제나팜 정]
임상 주의사항: 고용량 장기 복용 시 '순행성 기억상실' 유발 가능성 높음.
특이 사항: 해리성 장애 환자에게 투여 시 과거 기억의 인출(Recall)을 강제로 억제하여 심리적 안정을 도모함.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인지 개선'이 아니라 '인지 차단'이었다. 최 박사와 다영은 내가 그날 밤의 72시간을 다시는 열어보지 못하도록, 내 뇌에 암호를 걸고 포맷팅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호야, 약 먹어야지? 내가 물 떠 왔어."
방으로 들어온 다영이 푸른 알약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 내밀었다. 그녀의 미소는 아까 약국에서 본 복약 안내문의 폰트처럼 정갈하고 매끄러웠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 눈동자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를 살리려는 사랑일까, 아니면 나를 지우려는 공포일까.
나는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서늘한 감각. 하지만 나는 혀 밑 공간을 이용해 알약을 숨겼다. 다영이 내 입안을 확인하듯 끈질기게 쳐다보다가 이내 안심한 듯 방을 나갔다.
화장실로 달려가 약을 뱉어냈다. 변기 속으로 가라앉는 푸른 조각을 보며 나는 소름 끼치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영은 내가 기억을 되찾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고 당일 나와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고 했지만, 약봉투 속의 진실은 그녀가 내 기억의 유일한 **'삭제자'**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다영이 거실에서 TV 볼륨을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 번호 제한]
"약 먹지 마. 그들이 네 뇌를 죽이고 있어. 10분 뒤 집 앞 편의점 뒤쪽 골목으로 나와. 네 카메라 메모리 카드, 내가 가지고 있다."
카메라 메모리 카드. 사고 현장에서 사라졌던 내 기억의 유일한 백업 장치.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비 오는 날 보았던 것과 똑같은 검은색 대형 세단이 내 원룸 건물을 지켜보듯 서 있었다. 세단의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가고, 그 안에서 누군가 내 방 창문을 향해 스마트폰 조명을 깜빡였다.
다영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실을 지나, 나는 생애 처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고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준호야, 나 잠깐 밑에 분리수거 좀 하고 올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누워 있어."
다영의 목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닫혔다.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침대에서 튕겨 나갔다. 다영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길어야 3분. 나는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맨발로 운동화만 구겨 신고 집을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택했다. 8층에서 1층까지 단숨에 내려오는 동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1층 공동현관 유리문 너머로 분리수거장에 서 있는 다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이용해 건물 뒤편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약속 장소인 편의점 뒤쪽 골목. 젖은 박스 더미와 담배 연기가 뒤섞인 냄새 속에 검은색 세단이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내린 남자는 강민수 회장의 비서, 한 팀장이었다.
"이준호 씨, 제법이군. 그 감시를 뚫고 나오다니."
그는 주머니에서 SD 카드가 담긴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 손바닥에 거칠게 쥐여주었다.
"이 안에 당신이 3월 15일에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당신의 연인 김다영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다 들어있어. 확인하고 나면 연락해.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한 팀장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골목. 나는 카드를 꽉 쥐고 숨을 고르려는데,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강렬하게 진동했다.
[가족 공유 위치 알림: '김다영'님이 당신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아차. 사고 후 다영이 '내 안전을 위해' 설정해 둔 위치 공유 기능을 끄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내가 집을 나갔다는 것과, 지금 이 골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당황해서 워치를 풀려했지만, 골목 입구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골목 끝 가로등 불빛 아래, 노란 우비를 입은 다영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분리수거하려던 쓰레기봉투 대신, 내 방 서재에 있던 날카로운 커터칼이 쥐여 있었다.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준호야, 약 먹어야 할 시간인데 왜 여기 있어?"
다정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일정한 톤. 나는 뒷걸음질 치다 막다른 골목의 벽에 부딪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녀는 이미 내 '탈출'을 '반역'으로 간주한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무인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다영이 유리문 밖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덜컥.
"준호야, 문 열어. 비 맞으면 머리 아프잖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의점 내부에 비치된 공용 노트북을 켰다. SD 카드를 슬롯에 꽂았다. 파일들이 나타났다. 3월 15일 밤의 기록들.
동영상 파일을 클릭하자, 빗속의 한강 둔치가 나타났다. 화면 속의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를 향해 카메라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저 여자가 밀었다고!"
카메라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각도가 꺾였다. 화면 하단에 찍힌 범인의 신발. 그것은 다영의 구두가 아니었다. 3장 병원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최유진 박사'의 구두였다.
그리고 화면 구석, 쓰러진 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다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가해자가 아니라, 나를 살리려던 목격자였나?
혼란이 극에 달한 순간, 유리문 밖의 다영이 스마트폰을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 속에는 **내가 아닌 또 다른 '이준호'**가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준호야, 넌 네가 누군지 몰라. 네 안의 괴물이 그 사람을 죽인 거야. 난 널 지키려고 그 기억을 지웠던 거고."
다영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편의점 안에 울려 퍼졌다. 1막의 마지막, 나는 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혼돈 속에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