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세상이 저화질 비디오처럼 깨져 보였다. 지독한 노이즈와 함께 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이 지나가고 나면,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현실의 감각을 억지로 깨웠다. 천장의 형광등은 지나치게 밝았고, 규칙적인 맥박 측정기 소리는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준호야, 내 말 들려? 준호야!"
시야의 초점이 서서히 잡히자 다영의 얼굴이 나타났다. 평소 완벽하던 그녀의 메이크업은 다 번져 있었고, 눈은 핏발이 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하려 했지만 목구멍은 말라붙은 사막 같았다.
"선생님! 여기요! 준호 일어났어요!"
다급하게 달려온 의사가 내 동공에 불빛을 쏘았다. 뇌를 직접 찌르는 듯한 통경련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준호 씨,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습니까?"
"...... 병원."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언제죠?"
나는 머릿속의 폴더를 뒤졌다. 웹 디자인 마감, 듀얼 모니터의 열기, 식어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3월 12일 밤요. 작업하던 게 있어서..."
의사의 표정이 굳었다. 다영의 손이 내 시트를 꽉 쥐는 게 보였다.
"이준호 씨, 오늘은 4월 7일입니다. 당신은 3월 15일 밤 11시경, 한강 하부 도로에서 단독 사고를 당했습니다. 3주간 의식이 없었어요."
현실감이 상실됐다.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3주가 통째로 삭제됐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사고 직전의 **'72시간'**이 단 한 프레임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의사가 나간 뒤 다영은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그녀의 손은 지나치게 차가웠고, 떨림은 과했다. 32년 인생을 살며 쌓아온 내 '관찰력'이 경보음을 울렸다. 내가 아는 김다영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간호사였다. 지금의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연기'**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영아, 나 왜 거기 있었어? 마포에서 한강 대교 하부 도로는 드라이브 코스가 아니잖아."
"너 요즘 작업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잖아. 그날 밤에 갑자기 비 보러 가고 싶다고... 내가 말렸는데도 네가 억지로 운전대 잡은 거야."
다영의 말은 매끄러웠다. 마치 여러 번 되뇌었던 대본처럼. 하지만 나는 비 오는 날 운전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빗길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로 생긴, 내 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트라우마였다.
"내가... 비 오는 날 운전을 했다고? 혼자?"
"응. 도중에 나 배고프다고 편의점 앞에 내려주고는 금방 다녀오겠다고 했어. 그러다 사고가..."
다영은 내 시선을 피하며 창밖을 보았다. 거짓말이다. 나는 그녀를 혼자 밤거리에 남겨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인간이 아니다. 내 머릿속의 '나'와 다영이 설명하는 '나' 사이의 괴리감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오후가 되자 마포서 교통사고 수사팀의 박철민 형사가 찾아왔다. 그는 차가운 라테를 들이키며 내 침대 발치에 섰다.
"이준호 씨, 깨어나자마자 미안하지만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사고 직전 핸드폰 전원을 직접 끄셨더군요.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요? 전 핸드폰을 끄지 않습니다. 배터리가 없었겠죠."
"아니요. 강제 종료 기록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사고 현장에서 200미터 떨어진 풀숲에서 당신 가방이 발견됐습니다. 그 안에 이 카메라가 있더군요."
박 형사가 지퍼백에 담긴 내 미러리스 카메라를 보여주었다. 내 분신과도 같은 기체였다. 렌즈는 박살 나 있었고 바디는 진흙투성이였다.
"카메라... 메모리 카드는요?"
"정밀 감식 중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게 카메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혈흔이 묻은 노란 우비 조각이 같이 들어있더군요."
순간, 뇌리를 스치는 강력한 스파크가 있었다.
차가운 빗줄기, 바닥을 구르는 렌즈 캡, 그리고 구두 굽 소리. 누군가 내 이름을 낮게 부르는 소리.
"악!"
머리가 터질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다영이 달려와 박 형사를 밀쳐냈다.
"형사님! 환자 상태 안 보이세요? 당장 나가주세요!"
다영의 외침을 뒤로하고 박 형사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준호 씨, 당신이 찍으려던 게 단순히 한강 풍경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다영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내 등을 만지는 그녀의 손끝이 공포로 파들 거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내가 기억을 되찾는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확인하는 게 두려운 것이었다.
지워진 72시간. 그 블랙아웃된 시간 속에서 나는 죽음보다 더한 무언가를 렌즈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내 곁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연인 뿐일지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일주일 뒤, 나는 마포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낡은 종이 냄새와 오래된 커피 향, 그리고 누군가 억지로 지운 듯한 무취(無臭)의 공기였다. 내가 3년 동안 먹고 자고 작업했던 8평 남짓한 원룸.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마치 잘 꾸며진 모델하우스처럼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준호야, 일단 좀 누워. 내가 죽 좀 데워올게."
다영은 익숙하게 내 냉장고를 열고 반찬을 정리했다. 그녀는 마치 이 집의 안주인처럼 행동했다. 사고 전,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나? 내 기억 속 다영은 일주일에 한두 번 데이트를 즐기던 '적당한 거리'의 연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내 옷가지의 위치부터 비밀번호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영아, 내 노트북 어디 있어? 작업하던 게 생각나서."
"안 돼. 의사 선생님이 뇌에 무리 주지 말라고 했잖아. 모니터 빛은 쥐약이야."
다영은 단호했다. 그녀는 내 맥북을 서랍 깊숙이 넣고는 열쇠를 챙겼다. 보호라는 명목하에 자행되는 교묘한 격리.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 일상이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새벽 2시. 옆에서 곤히 잠든 다영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가슴속의 갈증이 통증을 압도했다. 나는 다영이 숨겨둔 서랍을 열려다 멈췄다. 그녀는 치밀하다. 서랍의 각도가 1도만 틀어져도 알아챌 것이다.
나는 대신 바카라상 밑에 처박아두었던 구형 아이패드를 꺼냈다. 메인 기기는 아니지만, 내 모든 작업물은 클라우드 서버와 실시간으로 동기화된다. 전원을 켜자 사과 로고가 뜨고, 익숙한 잠금 화면이 나타났다.
비밀번호: 0315
내 사고일이자, 기억이 끊긴 날. 손가락이 떨렸다. 접속이 성공하자 알림 배너들이 쏟아졌다. 클라이언트들의 독촉 메일, 결제 문자, 그리고... '3월 13일 자동 업로드 완료' 메시지.
사고 이틀 전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사진 앱의 [최근 항목] 폴더를 열었다.
3월 12일까지는 평범했다. 새로 작업 중인 웹사이트 시안,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사진, 길고양이 영상. 하지만 13일로 넘어가는 순간, 사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카메라 앵글이 지나치게 낮았다. 누군가 몰래 찍은 것처럼 흔들리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장소는... 내 집 앞 복도였다.
"이게 뭐야...?"
사진 속에는 퇴근하는 나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다음 사진. 내가 도어록 번호를 누르는 손을 확대한 컷. 누군가 복도 끝 비상구 틈새에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3월 14일 오후 9시. 사고 전날 밤이었다. 사진 속 배경은 비가 내리는 한강 공원이었다. 어둠 속에서 플래시 없이 찍힌 사진들은 노이즈가 심했지만, 그 피사체는 선명했다.
노란 우비를 입은 누군가가 검은색 대형 세단의 트렁크에 커다란 가방을 싣고 있었다. 가방 틈새로 삐져나온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그리고 약지에 끼워진 독특한 문양의 금반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8장에서 박 형사가 말했던 '강민수 살인사건'의 피해자. 유명 건설사 회장의 아들. 나는 기억나지 않는 그날 밤, 그 잔인한 현장을 내 렌즈에 담았던 것이다.
마지막 사진을 확인하려던 찰나, 아이패드의 매끄러운 액정 화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준호야, 안 자고 뭐 해?"
차가운 목소리.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아이패드를 엎었다. 어느새 일어난 다영이 침대 끝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번뜩였다.
"아... 잠이 안 와서. 뉴스가 궁금해서 좀 봤어."
"내가 모니터 보지 말라고 했잖아. 걱정돼서 그래, 걱정돼서."
다영은 천천히 다가와 내 손에 든 아이패드를 가져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스칠 때,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려는 듯 전원 버튼에 손을 올렸다.
"준호야, 너 혹시... 뭔가 기억난 거야?"
그녀의 질문은 다정했지만, 눈빛은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기억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다시는 이 방을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아무것도. 그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다영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생긋 웃으며 아이패드를 바닥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래, 다행이네. 푹 자. 내일은 최유진 박사님 상담 예약되어 있으니까."
다영이 다시 눕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둠 속에서 아까 본 사진의 잔상이 망막을 때렸다. 트렁크에 실리던 시체, 그리고 그 현장을 지켜보던 노란 우비.
가장 끔찍한 건 따로 있었다. 사진의 구석, 범인의 세단 유리에 반사된 촬영자의 얼굴.
그날 밤, 공포에 질려 셔터를 누르고 있던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내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있던 또 다른 그림자. 그림자의 주인공이 입고 있던 옷은, 지금 다영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가운이었다.
나는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내가 돌아온 곳은 안식처가 아니라, 살인마가 정교하게 짜놓은 거미줄 한복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