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이라는 가면과 '엄마'라는 갑옷을 벗고 마주한 진짜 나
오랫동안 머물렀던 나의 고민은 존재감이었다. 태어나 살아가며 나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경험을 많이 받아보지 못하였다. 스스로 잘 보이기 위해 생존을 위한 투쟁처럼 계속 남들의 기대를 살펴야 했다.
어느 순간 착한 사람이라는 가면에 너무 올인되어 있었다.
"나도 욕을 좀 해보고 싶어."
"하지 마, 너랑은 안 어울려."
"왜?"
타인의 말에 난 왜 라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난 왜 이렇게 된 걸까?
10살 즘 나를 계속 암흑으로 밀어 넣은 것은 ' 나는 누구지?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나는 왜 사람이지?'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어느 것에도 관심이 가지 않고 존재에 대한 물음만 계속 내게 물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의 관심과 주변의 관심은 달랐으니까.
그렇게 혼자 계속 생각이 깊어졌다. 사고의 깊이만큼이나 나는 그 알 수 없는 회오리에서 나오고 싶었다.
나오지 못하는 게 무엇 때문이지 몰랐다. 그냥 우울했고 무기력했으며 입을 다물고 상대를 계속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였다.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의 고민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시작된 지 15년쯤 흐르고 나는 자아수련을 하고 명상 수련을 하며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속 시원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냥 답답하기만 했다.
그 고뇌 속에 나는 여러 역할을 해나가야 했다. 그중 가장 힘든 건 엄마라는 역할이었다.
무겁고 부담되는 갑옷 같은 그 역할의 무게감에 나는 나를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고민의 시작 후 35년이 지나간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나는 왜 사람일까? 나는 누구 인가?'
밥 하는 사람인가? 글 쓰는 사람인가? 먹고 뚱뚱해진 모습이 나인가?
우울한 나? 가끔 조증으로 붕 떠있는 나? 잠 못 자고 계속 생각물기에 깊이 빠진 게 나일까?
나는 누구일까?
어느덧 물어보는 나와 나를 떨어져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물어보는 나일까? 여러 다양한 나를 계속 관찰하는 나일까?
나는 나를 그렇게 떨어져 보고 그리고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 존재의 나에 대해 그대로 믿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항상 부정했는데 이쁘지도 날씬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못생기고 뚱뚱한 무식한 사람이라고 나를 규정했다.
세상의 기준에 너무도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힘들었다.
근데 그게 그냥 놓아버리니 그대로 나를 보고 믿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존재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