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민 스님의 문장들에서 찾은 본래의 자유
무지와 다른, 열려 있는 '모름'
보통 사람이 말하는 '무지(無地)'는
그저 뭘 잘 모르는 멍한 부정적인 상태,
즉 무지함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른다'의 태도는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 모름은
대충 살겠다는 포기가 아니라.
지나친 확신에서 한 발짝 물러난 겸손한 상태에 가깝습니다.
○ "내 생각이 100% 맞다고 우기지 않겠다"
○ "이 사람을 완전히 안다고 단정하지 않겠다"
○ "이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미리 단정하지 않겠다."
이런 태도는 어쩌면
조금은 불편하고 불안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지혜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안다'고 믿는 사람은
배울 수 없지만,
"아직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든 새롭게 배우고,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욕하고 험담하는 말은
결국 자기 이야기 입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그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업이고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게 달려있습니다.
즉각 화나 짜증으로 반응하기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한번 자세히 살펴보세요.
타인을 정말로 이해하게 되면
화나 짜증의 반응은 많이 줄게 되고
그 자리를 수용과 연민이 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가져온 넓은 마음은
내 마음을 크게 흔들리지 않게 보호해 줍니다.
등대는
주변 모든 것을 비추지만,
정작 자신을 볼 수는 없습니다.
거울은 항상 세상의 모습을 비추지만
일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없이
텅 비어 있어요.
거울에 비친 세상 모습은
계속해서 나타나지만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고
깨끗이 또 사라져요.
끝없는 나타남과 사라짐이 있지만
텅 빈 공간은 계속 남아서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수 있어요.
두려움
바다에 이르기 전,
강은 두려움에 떤다고 합니다.
산의 봉우리에서 시작해 숲과 마을을 지나.
굽이굽이 긴 길을 흘러온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며,
이제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 앞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강은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번 흘러온 길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은 결국
그 두려움을 안고 바다로 나아갑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습니다.
강,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다가 되는 것임을.
-칼린 지브란
수련의 과정에서
많은 구도자들이
특이한 경계 체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정견이 없으면
특이한 경계 체험을 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구름이 사라져야
하늘을 볼 수 있는 줄 알고
수행한다며
생각 구름이 사라지길 바랐는데
밝아지고 보니
구름 자체 그대로가 하늘이었습니다.
마음공부는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어서
그 목표를 향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고
목표라는 것이
생각으로 정한 망상임을 보고
목표로 향하면서 분별하던 마음이
지금 여기서 바로
푹 쉬는 것을 말합니다.
뭘 자꾸 더 해서 좋은 어떤 상태를
경험해야 할 것 같은
그 마음을 쉬는 것이
진정한 마음공부입니다.
뭔가를 추구하면서 노력하면 더 멀어져요!
부처는
내가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벽한 부처님을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구원은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은혜로 이미 주어진 구원을
깊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사실과 해석을 나눠 보려 하고,
과거의 렌즈를 의식해 보고,
"지금은 아직 잘 모른다"고
말해 보려는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우리는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평생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조금 더 인정받고, 조금 덜 흔들이고,
조금 더 단단해지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이 바카라에서 함께 살펴본 것처럼,
'진짜 자유는 '완벽한 나'를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애써 만들지 않아도 이미 여기 온전하고 자유로운 존재를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불교에는
본래설불(本來成佛)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언젠가 부처가 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본래부터 부처의 자리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구나' 하는 발견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와 깊이 맞닿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나를 사랑하셨다"는 구원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항상 사랑 안에 있었기에
삶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전통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같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깨달음이나 사랑은
내가 애써 얻어내는 결과가 아니라.
이미 늘 여기 있었지만
너무 바쁘게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자리를
문득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불안이 올라오는 순간에도,
분노와 슬픔이 마음을 뒤덮는 순간에도,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아는 자리는
한 번도 다치거나 물들지 않았고
한 번도 더 완성되기를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생각이 쉬는 그 짧은 사이,
이미 온전한 내가 얼굴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생각까지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넓고 무한히 살아있는 마음 공간.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모습입니다.
삶의 파도가 거셀수록
폭풍우가 찾아와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이 사실은 더 선명해집니다.
당신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 전체입니다.
폭풍우 날씨가 아니라 변함없는 하늘입니다.
바다는 거친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천둥 벼락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도
무한한 마음 공간은 다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바카라의 모든 문장은
이제 조용히 당신 곁을 떠납니다.
이 문장들은
이쪽 강가에서 저쪽 강가로 건너도록
잠시 당신을 실어 나른 작은 배와 같습니다.
강은 건넌 뒤에는
배를 머리에 이고 갈 필요가 없듯,
이 글들도 모두 내려놓으세요.
이제는
큰 두려움 없이
이 삶을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살아내세요.
지금 여기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여러분을 항상 응원합니다.
혜민 두 손 모아
-혜민 스님의 '생각이 쉬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