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무례한 시선을 이겨낸 숭고한 삶의 기록
이름은 지워져도
마당가에 핀 민들레가 겨울을 났다고 해서
민들레가 아니었던 적 있느냐.
잠시 꽃잎 닫고 뿌리로만 숨 쉬던 시간도
민들레는 민들레였다.
너도 그렇다. 잠시 이름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네가 네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사람들은 참 쉽게도 말합니다. 온라인 게임을 쉬면 경력이 끊겼다고요. 하지만 세상에 끊어지는 삶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를 품에 안고 밤을 지새우던 시간, 가족의 식탁을 차리려 장바구니를 무겁게 들고 오던 길, 그 모든 순간에도 당신의 '삶'이라는 경력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경력단절'이라는 말은 참 차갑고 딱딱한 쇳덩이 같습니다. 그 단어는 당신이 그동안 쏟아부은 사랑과 인내의 시간을 '공백'이라 부르며 지워버리려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은 멈춰 있었던 게 아니라, 가장 소중한 생명을 피워내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꽃이 피지 않는 겨울이라고 해서 나무의 경력이 단절된 것이 아니듯, 당신의 시간도 그러합니다. 이력서의 빈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나를 기꺼이 내어준 숭고한 기록'으로 읽혀야 마땅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귀하고, 여전히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충분히 눈부신 존재입니다.
심리적 어려움과 정체성에 관한 연구에서 보면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들은 단순한 미취업 상태를 넘어 '존재감 상실과 우울'을 경험합니다. 특히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자아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는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슬롯는 '경력'이 끊겼다고 말하지만, 개인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고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저 역시도 출산과 육아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며 다시 취업을 하려고 면접을 보면.
"경력이 단절되었네요. 음... "
곤란한 면접관의 표정과 볼펜을 맥없이 굴리는 몇 초의 시간이 너무도 깁니다. 대답을 찾다가 그냥 삼킵니다.
출산과 육아는 선택이라기보다 필요에 의한 시간이었고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몇 해전 '82년생 김지영', "며느라기"라는 드라마가 육아맘, 워킹맘들의 공감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근데 그것은 일부분의 공감이겠지요. 경험의 값을 치른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역경을 이기고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도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내며 자신과 또 다른 슬롯의 시선을 견디어야 했으니까요, 우리는 집에만 있는 육아맘을 맘충이라 비하하며 그 고생을 그냥 눈살 찌푸리는 광경으로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시간을 견디며 많은 것은 희생하는 그녀들에게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한 생명을 정성껏 키워낸 그 숭고한 시간을 '집에서 노는 시간'으로 치부해 버리는 세상의 무례함에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보낸 그 시간은 헛산 인생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한 '사랑의 경력'을 쌓아온 시간이니까요.
비록 몸은 고되고 마음은 피로에 지쳐 있을지라도, 오늘만큼은 거울 속 자신에게 나지막이 속삭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동안 참 잘 살았다. 누구보다 애썼다. 너는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단다."
이제 '경력단절'이라는 차가운 꼬리표를 떼어내고,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는 당신의 모든 발걸음을 응원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귀하며, 무엇보다 당신 그 자체로 충분히 눈부신 존재입니다.
참고: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 경험에 대한 질적 연구>(박은주 외, 2017), <경력단절 육아전업주부의 정체성 위기에 관한 연구>(성기정,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