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체화된 분노라는 말을 들었다.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고 견디다 반복되는 상처에 그 마음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끌어안고 경직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혈질이라는 것이 부정적 기질 같지만 참으로 희망적이기도 하다.
파르르 떨며 분노를 표현하고 그 마음을 희석시켜 흘려보내면 마음에 쌓여 굳어버리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러다 보면 분노의 화살이 다른 이에게 옮아 가겠지만 그건 그 사람 몫이다 쳐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고체화된 분노의 응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은 그러지를 못한다.
내가 받는 상처보다 상대방이 받는 상처에 더 안절부절 못하고 남에게 상처주는 자신을 더욱 폄하하기 때문이다.
펄펄 끓어오르다 처리되지 못한 감정은 애매한 상태로 미적지근해진다.
그러다 반복되는 상처에 냉랭해지고 서서히 굳어간다.
일회성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기한이 있는 관계에서는 고체화된 분노랄 것도 없다.
하지만 부모, 자식, 부부처럼 운명처럼 연결된 관계는 벗어날 수 없기에 견디고 참다 보면 그럴 수 있다.
외면하고 싶은 부모를 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하고 싶은 자식을 둔 부모는 그보다 많지 않을 것 같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게임이니까.
체념한 사람은 표정이 없다.
그래서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본다.
안면 피드백 가설(facial feedback hypothesis)에 따르면 얼굴 표정이 감정 경험에 미치는 영향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한다.
웃어서 안면 근육에 자극을 주면서 뇌를 속여본다.
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다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시 슬퍼진다.
내 마음은 이미 돌덩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부싯돌로 웬만큼 부딪쳐도 반응하지 않는다. 어쩌다 잘 맞아 떨어지면 불꽃이 일기도 하겠다만 뭔가를 집어삼킬 불꽃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렇게 불꽃이 일었다 한들 지나가는 한 점 바람에 쉬 꺼질것만 같다.
차라리 돌덩이가 되기를 바라며 또 도망치고 있다.
작은 불씨가 스치기만해도 촤라락 타오르는 아찔함이 두렵다.
타고 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린 잿더미를 마주할까 두렵다.
난 이러다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져버리는 건 아닐까?
이 터널에도 끝이 있는 걸까?
오늘도 알 수 없기에 억지 미소를 지어 나를 속인다.
그리고 발끝부터 쥐어짠 힘을 모아 큰 웃음 지으며 일터로 향한다.
일터에서의 바쁨과 주변 사람들의 에너지가 또 나를 속인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니 나도 그들처럼 행복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