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여덟살 엄마의 지우개 타령

토편지

by심풀

멀리 있지만 항상 곁을 지키는 그대에게,

여든여덟살 엄마는 YWCA 노인 일자리 알바를 하십니다.

동네에 재활용 쓰레기 나오는 날, 종이박스 정리를 하는 일이라 아주 흡족해하면서 즐거이 일하고 계십니다.

"이름을 쓰다가 엉뚱하게 썼는디, 어뜨케?"

저물무렵, 동네 회관 마실을 다녀오신 엄마는 뜬금없이 먹구름이 낀 낯빛으로 도움을 청하더군요.


image.png지우개가 뭐라고☆

"그래요? 누구나 그럴 수 있지요."

가벼이 댓구를 하니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지우개 타령을 하십니다.

"그라무는 잘못 쓴 거 말이여.

지우개로 지우믄 워떨까?"

연필로 쓰면 지우개로 싹싹 지울 수 있는 문제이니 그리 생각하시는 기색이셨습니다.

"그 이름말인데, 연필로 썼어요?"

연필로 썼다면 지우는 일이야 간단할 텐데.

아무래도 연필로 이름을 쓰지는 않았겠지요.

"아녀! 연필로 쓰믄 안된다구 혔어.

볼펜으루 썼는디?"

연필이 아니라 볼펜으로 쓰셨다니 그럼 볼펜 지우개 화이트, 일명 수정액이나 수정테이프가 필요하겠다싶었습니다.

"내 것으론 수정액이 있어요. 어떻게 쓰는 지 보여드릴게요."

수정액을 따각따각 흔들어대면서 신문위에 글씨를 직접 지우며 시범을 보여드렸습니다.

"여기 이 글자위에다 수정액을 조금씩 덧씌우면 글자가 가려지는 거예요."

엄마는 신기한 눈초리로 수정액이 글자를 가리는 순간을 물끄러미 쳐다보셨습니다.

"그럼 이걸 엄마 드릴테니 활동일지에 가져가서 수정을 해보셔요."

그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알바시간이 다가오자 엄마가 안절부절하시더니 수정펜을 다시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내놓으셨습니다.

"근디 말이여. 니가 직접 마을회관에 가서 그 활동일지의 이름을 지워주믄 좋것어. 나는 이거 가지구 가도 못할 거 같어서 그랴."

생전 처음보는 물건인 수정펜을 다룰 줄 모르니 겁이 난 것이었습니다.

이미 당신의 이름을 엉뚱한 곳에 적어놓았으니 민망한 데다가 깜쪽같이 지우면 좋겠는데 그역시

자신이 없었던 것이고요.

어떤 마음으로 그 말씀을 하시는 지 환히 알것 같아서 군말없이 끄덕끄덕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요. 그럼 그 활동일지에다 직접 지워드릴테니 걱정마셔요."

오토바이에 엄마를 뒷자리에 태우고 서둘러 마을회관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함께 알바활동을 하고 계신 동네 어르신이 나오시기전에 감쪽같이 지우고 싶은 엄마마음을 모르지 않았거든요.

"그런디 말이여. 연필 지우개처럼 아주 티가 안나게는 안되는 거여?"

아하! 하얀색으로 덧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셨구나.

엄마는 감쪽같이 없었던 것처럼 지우길 바라셨던 겁니다.

"아직까진 이게 최선이에요. 글씨를 지웠으니 이거면 아무도 트집잡지 않을 거예요."

엄마가 미심쩍어하시길래 위로의 말까지 살뜰히 건네야했습니다.

코흘리개 시절, 선생님 한마디에 벌벌 떨던 꼬맹이처럼 작은 실수에 기겁하는 엄마 모습.

여든여덟살에 자그만한 실수에 안절부절하시니 보기 안쓰러웠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 연세에 알바를 하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었고요.

진심에 진심으로.

다음 주 토요일, 제 편지를 오늘처럼 기다려 주실 테지요.

나와 그대의 심풀 올림


image.png그대와 나에게 보내는 편지☆


작가의 이전글광복절 휴일, 친일파 조상 뉴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