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편지
멀리 있지만 항상 곁을 지키는 그대에게,
1983년생 박 준시인을 근래 글로 만났습니다.
최근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으로 처음, 그리고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과
『계절산문』까지 줄줄이 읽었습니다.
내노라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는 주로 산문시로 온갖 상징이 넘쳐나는 지라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던데, 단 한사람 박준시인의 시는 다르더군요.
막힘없이 읽히면서도 정제된 시어가 가슴을 열고 뚜벅뚜벅 들어왔습니다.
내친김에 그의 산문집도 연거푸 읽어봤습니다.
시는 시대로 산문은 산문대로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까지 도무지 지루한 줄 모르고 빠져 읽었습니다.
'무언가 끌어당기는 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젊은 시인을 만나다니 행운이로구나'
그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들불처럼 일어나 그의 이름을 두드려봤습니다.
CBS라디오에서 깊은 밤 방송을 맡은 적도 있다니 그는 다방면에 재능이 빛나네요.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한두페이지 가량의 짧은 글이 부담없으면서 글과 글 사이의 간격이 넓어서 더욱 편안하였습니다.
한 페이지 꽉차게 글로 채워놓은 숨막힐 것 같은 여느 바카라과는 다른 여유로움이 또한 반가웠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몇 부분을 인용해 보아요.
환절기
환절기를 지나며 나는 더 아팠어야 했는데, 아프지 않으려 하지 말고, 일을 접어두고 병원에 가지 말고, 따듯한 물을 많이 마시지 말고, 구깃구깃한 약봉지를 뜯어 입에 털어넣지 말고, 밀린 걱정들을 떠올려가며 더 아팠어야 했는데. (중략)
새로 맞은 아침, 힘겹게 들어오는 창의 빛을 보며, 조금 나아진 것 같은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맞았어야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몇 번이고 되뇌었어야 했는데.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30쪽
계절이 바뀌는 애매한 순간을 으레 환절기라고들 합니다.
더웠다가 추워지거나 반대로 추웠다가 더워지거나 훅 떨어져내리는 기온차이가 마치 롤러코스터같지요.
우리의 몸은 급격한 차이를 견디다못해 여기저기 아픔에 시달리지 않던가요.
그러다보니 환절기, 이래저래 흔하지만 결코 무시못할 감기에 걸려 짧게는 며칠을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몇주를 골골대며 병원치레를 겪습니다.
얼른 낫아야 한다거나 푹 쉬어야 한다는 판에 박힌 말이 아니라 더 깊이 아팠어야 한다는 시인의 글이 생뚱맞아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공감의 끄덕임을 불러왔습니다.
어영부영 피하려 말고 온몸을 던져서 뚫고 지나가라는 다정하지 않으나 다정한 응원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삶의 아픔을 정면돌파하라는 속깊은 격려의 말처럼요.
작은 일과 큰일
산의 맨 이마를 덮어두는 구름처럼 요즘 나는 손으로 내 이마를 자주 짚어본다. 더러 미열을 앓는 날도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마에 손이 포개어질 때의 촉감은 손바닥보다는 이마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중략)나는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일들을 좋아한다. 밤새 내린 눈으로 산이 하얗게 변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흰 산을 눈에 넣으며
감탄하는 일, 따듯한 물에 언 발을 담그는 일,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일……우리와 함께하는 작은 일들은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흔한 것이다.(중략) 작은 일들은 작은 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160쪽
여든여덟 엄마의 입버릇은 두가지입니다.
"클났어!(큰일났어)"와 "죽것어(죽겠다)"
엄마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이 말 사이를 오락가락하시면서 하루를 보내셔요.
비가 하루종일 내린다고 혹은 비가 일주일 넘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그대로 듣다보면 세상의 모든 일이 큰 일이 아닌게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말대꾸를 하지 않자니 찜찜한 노릇이라 건성건성 말을 섞지 않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여대는 것만으로 들은 시늉을 낼 뿐입니다.
날마다 유난히 엄마에게 쏟아져 내리는 세상 큰 일의 사소함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섞어 살며시 픽픽 웃음을 지으면서 말입니다.
여든여덟의 엄마에게 세월따라 자잘한 작은 일이 몽땅 사라져버린 셈이라 남은 건 죄다 큰일, 조목조목 따져보는 일마저도 덧없고요.
어른이 된다는 것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 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을 이렇게 달랐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148쪽
돌아보면 어찌할 수 없이 후회할 일 투성이.
더하여 나이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자바카라과 후회거리도 그와 같이 가슴 한켠에 쌓여요.
어릴 때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건만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어른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바카라임과 의무만으로도 이미 버거운 일상입니다.
'저속노화'
애매모호하면서 언뜻 희망고문같은 낱말이 공공연한 화두이다.
이 말은 속수무바카라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게 두려운 우리 현대인들의 욕심으로 빚어낸 정교한 말의 향연 아니겠는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민낯인 것으로 치자면 이런저런 후회따위로 눈살 찌푸리고 얼룩질 일 없을텐데.
제 속을 활짝 열어 버린 진짜 어른다운 어른의 한 말씀이겠지요.
진심에 진심으로.
다음 주 토요일, 제 편지를 오늘처럼 기다려 주실 테지요.
나와 그대의 심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