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의 「다정가」에 보내는 가을밤의 답시
밤이 깊었다.
바카라상 위에는 읽다 만 바카라 한 권이 펼쳐져 있고
옆에는 이미 식어버린 차 한 잔이 있다.
창밖에는 달이 떴다.
가만히 바카라상을 비추는 달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된 시조 한 수가 생각났다.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1269~1343)이 남긴 「다정가」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배꽃에는 달빛이 희고
은하수 걸린 밤은 깊어 삼경인데,
나뭇가지 하나에 깃든 이 봄마음을
저 두견새가 알기나 할까.
마음이 너무 많은 것도 병인 듯하여
오늘 밤 잠들지 못한다.
(삼경은 밤 열한 시부터 새벽 한 시 사이, 가장 깊은 밤이다.)
처음 이 시조를 알았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사랑 노래라고 생각했다.
달빛이 있고,
배꽃이 있고,
두견새가 있고,
그 아래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고전적인 사랑인가.
그런데 세월이 지나 다시 읽으니
이상하게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마음이 많은 것도 병이라니.
사람으로 오래 살아보니
조금 알 것 같다.
미워해서 잠들지 못하는 밤보다
마음이 남아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
더 많다는 것을.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때 왜 그 말을 하지 못했는지 생각나서,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그쪽으로 돌아가서.
사람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밤을 몇 번씩 건넌다.
젊었을 때 기다림은
대개 문밖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고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고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오지 않으면 서운했고
늦으면 화가 났고
끝내 오지 않으면 울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기다린다는 말속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와달라는 마음도
숨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젊은 날의 기다림은
뜨거웠다.
뜨거운 만큼
자주 아팠다.
그런데 지금의 기다림은 조금 다르다.
이제는 기다린다고 해서
꼭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멀리 있는 사람이
그곳에서 잘 지내기를 기다리고,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
자기 계절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고,
어제보다 조금 나은 내가 되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어떤 것은
오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아니,
오지 않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좋은 길이라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다림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기다림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젊은 날에는
나에게 오기를 기다렸다면,
지금은
그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잘 살아가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기다림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기다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조년은 봄밤에 잠들지 못했다.
나는 오늘
가을밤에 그의 시를 읽는다.
계절은 다르고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기다리는 사람도 다르다.
그런데 달은 묘하게 같다.
칠백 년 가까이 전
그의 창가를 비추었을 달빛이
오늘 내 바카라상에도
말없이 내려앉는다.
그래서 오래전 사람에게
답시 한 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달은 같은 달인데
기다리는 마음은 계절마다 다르더라.
봄에는
오기를 기다렸고,
여름에는
머물기를 바랐으며,
가을이 되어서야
가는 사람의 등을 바라볼 줄 알았다.
오지 않아도 좋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평안하다면,
오늘 밤 달빛 한 자락
그 사람 창가에도 닿기를.
나는 여기서
내 몫의 밤을 지킬 테니.
그래도 시조에는 시조로 답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그의 가락을 빌려 한 수를 더 적었다.
국화에 월백하고
식은 차 한 잔인 제
떠난 이 평안하길 귀뚜리야 알랴마는
다정히 병이라 해도
잠 못 든들 어떠리
바카라을 덮지 않았다.
차도 다시 데우지 않았다.
식은 차는 식은 채로 두고
한동안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는
끝내 만나지 못해도 되는 기다림도 있다고.
기다림의 끝이
반드시 만남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 사람이 잘 살아 있다는 소식 하나,
혹은 아무 소식이 없다는 평안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기다림이 있다고.
이조년은 말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칠백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 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다정히 병이라면
굳이 다 낫지는 말자고.
조금쯤 마음이 남아
누군가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달이 좋은 밤이면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정도의 병이라면,
그것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
앓아볼 만한 병이 아니겠느냐고.
창밖의 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달은 같은 달인데
기다리는 마음은
계절마다 다르더라.
— 쉼표 JEONGSEON
#이조년 #다정가 #시조 #답시 #답시조 #가을밤 #기다림 #고전시가 #감성에세이 #쉼표JEONG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