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품고, 세월을 지나, 마침내 인생이 되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조차 아껴두던 날,
마음 한편에 누군가 자꾸만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보고 싶다는 차마 무거운 말 대신
괜스레 먼 창밖을 오래오래 건너다보던 시절.
달이 오롯이 밝은 밤이면
그저 달빛이 고와서 그런 줄 알았고,
바람이 차갑게 소슬한 날이면
그저 가을바람이 쓸쓸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주 오랜 지나고서야 알았습니다.
달빛도, 바람의 소리도 아닌
당신이라는 한 사람이 그리운 것이었음을.
그 그리움이 하얗게 밤을 지새우자
어느 날,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이상하고도 서러운 것이어서
곁에 머물 때보다 돌아서는 뒷모습에 더 많은 말을 남겼고,
함께 소리 내어 웃던 날들보다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던 그 소슬한 순간을
더욱 깊고 오랫동안 가슴에 새기게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눈물겹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을 내 품에 꼭 안아두는 일만이 아니라,
그 사람마저 떠나간 그 빈자리까지
마음 깊은 곳에 가만히 남겨두고 돌보는 일이라는 것을.
사랑이 겹겹이 쌓여 계절을 지나자
어느새 사람들은 그것을 ‘세월’이라 불렀습니다.
봄에는 떨어지는 꽃잎에 눈시울이 젖었고
여름에는 쏟아지는 장대비를 홀로 맞았습니다.
가을에는 밟히는 낙엽 소리에 마음을 베였고
겨울에는 화로 앞에서 지나간 따스했던 봄을 다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거침없이 떠나보내고 나니
젊고 아리땁던 얼굴 위에도 고요한 시간의 결이 앉고,
그토록 선명하게 가슴을 할퀴던 아픈 일들도
어느 날엔가 아련하고 작은 추억 하나로 고요히 침전해 있었습니다.
세월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까마득히 잊게 만드는 줄로만 알았더니
오히려 내가 끝내 잊지 못한 단 하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투명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야 인생의 잔을 비우며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삶이란 그리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었음을.
내 영혼을 흔들며 그리워할 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 단 하나의 사랑을 가슴 품에 태산처럼 품은 채
이 서러우나 아름다운 긴 세월을 건너왔다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생(生)은 이미 충분히 참되고 깊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는 이제
다가오는 그리움을 굳이 밀어내려 애쓰지 않으렵니다.
여전히 그리움이 조용히 피어난다는 것은
아직 내 어두운 마음 어딘가에
당신을 향한 따스한 찻자리가 남아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오늘 밤 달이 투명하게 밝거든
잠시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아보아야겠습니다.
그리운 이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거든
굳이 잊으려 애쓰지도 않으렵니다.
그저 내 쓸쓸한 마음 한편에
가장 따뜻한 귀빈으로 고요히 앉혀두고 싶습니다.
그리움이 아지랑이처럼 일어야 사랑을 온전히 품을 수 있고,
그 사랑을 깊이 품어야 흘러가는 세월을 눈물 없이 견딜 수 있으며,
그 세월을 마침내 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가없는 절경을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그러니 님이여,
오늘 밤 나와 같은 저 투명한 달을 바라보고 있다면
굳이 나를 찾아 방황하지 마시오.
그대가 달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나를 단 한 번 가슴 깊이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이미
그대의 가장 가까운 곁에 숨 쉬고 있을 터이니.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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