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오래된 시 한 수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었다

by쉼표JEONGSEON


오늘 아침 하늘은 어제와 사뭇 달랐다.


어제는 붉게 물든 가을 하늘이 한참이나 나를 붙잡더니,

오늘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먹구름 사이로 빛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름이 걷힌 것도 아니었다.

하늘이 갑자기 맑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검은 구름 사이 아주 작은 틈으로

빛이 자기 길을 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된 시 한 수가 생각났다.


윤선도의 「오우가」 가운데 달을 노래한 부분이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수백 년 전에 쓰인 시인데

오늘 읽어도 이상하리만큼 마음 가까이 다가온다.


특히 마지막 한 줄.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나는 그 문장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자꾸 말을 찾는다.


괜찮다고 말하고,

잘될 거라고 말하고,

조금만 견디라고 말한다.


좋은 말을 찾아 건네는 것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살다 보니

말하지 않는 위로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사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도

쉽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내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조용히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어쩌면 윤선도가 달을 벗이라 부른 까닭도

그런 데 있지 않았을까.


달은 밤마다 세상을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의 기쁨도 보고

슬픔도 보고

부끄러움도 보고

눈물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높은 곳에서

묵묵히 세상을 비춘다.


국가사 편찬위원 회의 해설에서도 「오우가」의 달은 만물을 두루 비추는 밝음과 더불어 보고도 말하지 않는 침묵의 덕성을 지닌 벗으로 설명된다.


오늘 아침의 하늘도 그랬다.


검은 구름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내.”


“괜찮아.”


“곧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그런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참 그 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구름이 걷혀야 빛이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빛은 이미 구름 뒤에서 오고 있었다.


삶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마음이 흐린 날이 있다고 해서

빛까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어딘가에서 빛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 나는 자꾸 하늘을 본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구름 하나,

저녁이면 붉어지는 하늘 한쪽,

아침 창문으로 들어오는 작은 빛에도

한동안 시선이 머문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글을 쓰기 시작해서인지 모르겠다.


다만 예전에는 하늘을 보았다면,

요즘은 하늘에게서 자꾸 문장을 듣는다.


오늘은 그 문장이

수백 년을 건너 윤선도의 시 한 수와 만났다.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생각해 보면 참 좋은 벗이다.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무엇을 증명하라 하지 않고,

내가 어떤 하루를 살았는지 캐묻지도 않는 벗.


그저 바라보고

그저 비추어주는 벗.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곁을 밝혀주는 사람.


오늘 아침 나는

검은 구름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다가

그런 벗 하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된 시 한 수를

마음속에 다시 옮겨 적었다.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오늘은 이 한 수면 충분하다.




— 쉼표 JEONGSEON


#윤선도 #고전문학 #마음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