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거짓말에 통장 잔고로 답해보았다
서점 문에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너는 존재 자체로 빛나"
창문에 빼곡히 붙은 글귀들을 보고 있자니, 처음엔 찔끔 눈물도 나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홀린 듯 바카라을 집어 들고 겉표지를 본 뒤 딱 3장을 넘겼다. 그런데 3장째에서 바로 지루해진다.
‘어라, 이건 내가 찾는 내용이 없잖아?!’
전자레인지 돌리는 3분도 길어서 쳐다보고 있는데, 바카라 페이지 판단하는 데는 딱 3초면 끝난다. 진지함이라곤 1도 없다. 성급하고, 초조하고, 불안하다. 깨알 같은 글씨들은 다 필요 없고, 오직 지금 당장 '나한테 맞는 글자'만 찾아 눈알을 바쁘게 굴린다. 이게 바로 나를 포함한 현시대 사람들의 지독한 조급함이다.
하지만 어렵게 시간 만들어서 서점까지 외출했는데, 그냥 빈손으로 돌아서자니 왠지 모르게 민망하다. 결국 읽지도 않을 게 뻔한 비싸고 두꺼운 바카라 세 네 권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한다.
"3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집에 와서 바카라장에 멋드러지게 꽂아두면 끝이다. 으하하! 폼생폼사, 남들이 지성인 코스프레 하는 건 나도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통장에 마이너스 숫자가 자꾸 늘어나든 말든 일단 결제하고 보는 후회막급 인생... 생각할수록 무릎이 떨린다.
얼마 뒤 친구를 만나 카페에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괜히 지성인인 척 슬쩍 물었다.
"너 요즘 베스트셀러인 그 바카라 읽어봤어?"
"응! 겉표지만. 우하하."
순간 맥이 풀리면서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 너나 나나 똑같다. 똑같으니 친구지! 겉표지와 목차만 스캔하고 마치 바카라 한 권을 다 씹어 먹은 듯 폼 잡는 우리 모습이 어이없어서 또 한 번 웃참 실패다.
결국 몇 달 뒤, 바카라장에 먼지만 쌓여가는 바카라들이 너무 보기 싫어 빅사이즈 박스를 꺼냈다. 몽땅 쑤셔 담아 중고 매장으로 고고! 2만 5천 원 주고 산 새 바카라이 단돈 3천 원에 팔려 나가는 기적의 연금술을 직관했다.
'아... 다시는 절대 이렇게 살지 말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진심으로 깊게 다짐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작심삼일. 어차피 인생 뭐 있나? 그냥 한 방이다!
그래도 헐값에 넘긴 영수증과 마이너스 통장 잔고를 동시에 확인한 순간, 실소는 서늘한 현실감으로 바뀌었다.
아니, 안 괜찮은데? 하나도 안 괜찮은데 자꾸 뭐가 괜찮다는 거야?
3초 만에 스캔해서 읽은 무바카라임한 힐링 문구들은 마치 이가 다 썩어가는 환자에게 수술은 안 해주고 달콤한 알사탕만 입에 물려주는 것 같았다. 사탕을 녹여 먹는 동안이야 잠시 달콤하겠지만, 알맹이가 다 녹고 나면 더 지독한 치통과 함께 차가운 현실이 찾아올 뿐이다.
그때 깨달았다. 나한테 지금 필요한 건 3초짜리 몽글몽글한 위로가 아니었다. 뼈를 때려주는 차가운 현실이었다.
내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했을 때, 놀랍게도 슬픔이나 좌절보다 먼저 찾아온 건 '어이없음에서 나오는 웃참'이었다.
"와, 내 인생 진짜 어쩜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지?"
"와, 2만 5천 원짜리가 3천 원이 되는 마법이라니, 대단하다 참!"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오히려 헛된 기대감이 싹 사라졌다. '언젠가 막연하게 잘 되겠지'라는 낭만이 걷힌 자리에, '아, 지금 당장 이거 안 하면 진짜 망하겠구나'라는 아주 명확하고 현실적인 생존 본능이 깨어났다.
놀랠 것도 없다. 이게 진짜 내 현실인데 뭐.
갑자기 예전 베트남 여행 때 마셨던 얼음 동동 띄운 333 맥주 한 잔이 간절해진다. 아 맞다, 나 술 끊었지! 허탈하게 한 번 웃고는 시원한 보리차 한 잔 벌컥벌컥 마신 뒤, 그냥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차가운 현실은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거품을 다 걷어내고 바닥을 치게 만드는 가장 튼튼한 발판이니까.
오늘의 현실 직시 한 줄:
"2만 5천 원짜리가 3천 원이 되는 중고 매장의 매운맛. 헛된 낭만보다 차가운 영수증 한 장이 나를 더 정신 차리게 만든다."
작가의 한 마디:
여러분도 비싸게 주고 산 바카라 헐값에 중고 매장에 팔아넘기고 "다시는 안 그래!" 다짐해 본 적 있으신가요? 댓글로 여러분의 웃픈 작심삼일 잔혹사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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