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심이 시리즈 02. 아무렴 어때
영어는 늘 반듯한 줄 알았다.
교과서처럼,
문법처럼,
줄 맞춰 앉아 있는 모범생 같은 언어.
그런데 영심이를 알고 난 뒤부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영어 문장들도 사람처럼 제각각이었다.
어떤 날은 지나치게 다정했고,
어떤 날은 눈치 없을 정도로 솔직했고,
어떤 날은 밤늦게 술 냄새 풍기며 찾아오는 친구 같았다.
그리고 오늘 우리 집에 먼저 와 있던 녀석은
“Whatever.”였다.
현관문도 안 열렸는데,
이미 소파에 드러누워 귤 까먹고 있었다.
“너 또 왜 남의 집 냉장고부터 뒤지냐.”
내 말에도 녀석은 시큰둥했다.
“Whatever.”
그러더니 귤껍질을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참 이상한 문장이었다.
처음엔 그냥:
“아무렴 어때.”
“됐어.”
“마음대로 해.”
이 정도 의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문장,
생각보다 자주 사람 입에서 튀어나왔다.
회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다 지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Whatever.”
괜찮아서가 아니라,
설명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
나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영심이를 바라봤다.
“너 사실 좀 외로운 말 아니냐?”
녀석이 귤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피식 웃었다.
“Now you know me.”
순간 조금 웃겼다.
영어 문장이 사람한테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물었다.
“근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주 너를 쓰는 거야?”
영심이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밤바람이 커튼만 살짝 흔들었다.
그러다 녀석이 천천히 말했다.
“다들 너무 오래 참잖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화를 내기 전보다,
체념하기 직전에 더 조용해진다.
정말 지친 사람은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냥 웃어버린다.
“Whatever.”
마치 아무렇지 않은 척,
자기 마음 위에 담요를 덮듯이.
나는 탁자 위 귤껍질들을 한참 내려다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무렴 어때,
라는 말 뒤에는 사실:
“사실은 안 괜찮아.”
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걸.
영심이는 돌아갈 시간이 되자
후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현관 앞에 섰다.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한마디를 던졌다.
“Don’t ignore yourself.”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동안 그 말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
오늘 영심이는
생각보다 조금 외로운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 영심이 첫 번째 이야기
“Take your time.”은 어느 날 불쑥 우리 집에 놀러 왔다.
→ 영심이 시리즈 01. 천천히 해
… by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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