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심이 시리즈 01. 천천히 해
영어는 늘 바카라 속에만 사는 줄 알았다.
단어장 사이에 납작하게 눌린 채,
형광펜 자국이나 뒤집어쓴 얼굴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영어 문장들이 꼭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옆집 사는 이상한 친구들처럼.
초인종도 안 누르고 불쑥 들어와서는,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는 그런 부류.
오늘 우리 집에 찾아온 녀석은
“Take your time.”이었다.
녀석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사람처럼 우리 집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내 쪽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Take your time.”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야.”
“너 그 말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냐?”
녀석은 냉장고에서 귤 하나를 꺼내더니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왜?”
“세상이 안 그렇잖아.”
“천천히 했다간 바로 뒤처지는데 뭘.”
그러자 녀석이 귤을 까먹으며 중얼거렸다.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왠지 모르게,
영어 문장 주제에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녀석이 소파에 드러누운 채 다시 물었다.
“So.”
“What did you think I was?”
“… 뭐?”
“I said.”
“What did you think I was?”
나는 한참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글쎄.”
“솔직히 널 사람처럼 생각해 본 적은 없지.”
“그렇지?”
녀석은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늘 나를 시험 문제처럼 대하더라.”
“아니야?”
“아니긴.”
“넌 영어바카라 뒤쪽 회색 페이지에 사는 애 같았어.”
그러자 “Take your time.”이
살짝 삐진 얼굴로 귤껍질을 내 쪽으로 툭 던졌다.
“너무하네.”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녀석이 갑자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있잖아.”
“… 왜.”
“오늘 네 얼굴 봤거든.”
녀석은 잠시 귤 까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You look tired.”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꼭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표정을
정면으로 들킨 기분이었다.
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그러자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No.”
“Not everyone.”
그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다시 말했다.
“Take.”
“Your.”
“Time.”
꼭 한 단어씩,
내 머릿속에 천천히 눌러 담듯이.
잠시 후, 녀석은 현관문 앞에서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고는
뒤도 안 돌아본 채 손만 휙 흔들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며 툭 던졌다.
“See you tomorrow.”
문이 닫힌 뒤에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내일은 또 어떤 영어 문장이
우리 집 냉장고부터 열어볼 생각일까.
생각해보니 이름도 없이 부르기엔
이 녀석, 우리 집에 너무 자주 놀러 온다.
영어 문장 주제에
귤도 까먹고, 사람 마음도 들여다보고,
아무렇지 않게 소파까지 차지해버리니까.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이상한 영어 친구를
“영심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by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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