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살아보니, 이해되는 말들이 있었다

by진경수
프로로그.jpeg

젊은 날에도 노자(老子)를 읽었다.

밑줄을 긋고, 마음에 드는 문장 옆에는 작은 표시를 해두기도 했다. ‘도(道)’가 무엇인지, ‘무위(無爲)’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지 나름대로 헤아려보기도 했다.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은 말과 내 삶 사이에는 아직 제법 먼 거리가 있었다. 바카라을 덮으면 노자는 바카라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갔다.


그곳에서는 낮아지는 것보다 올라가는 것이 중요했고,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것이 익숙했다. 기다리기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고, 뒤처지지 않으려면 남보다 한 발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험을 보면 합격하고 싶었다. 학사를 마치면 석사, 석사 학위를 얻으면 박사 학위를 받고 싶었다. 일을 시작하면 성과를 내고 싶었다. 사업을 하면 성장시키고 싶었고, 산에 오르면 정상에 서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 돌아보면 참 부지런히 도 앞을 보며 걸었다. 그 시절의 나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앞서고 싶었던 마음이 나를 공부하게 했고, 부족하다는 생각이 새로운 길을 찾게 했다. 실패가 속상했기에 다시 바카라을 펼쳤고, 한번 시작한 일은 쉽게 놓지 않으려 애썼다.


욕심도 때로는 나를 밀어준 바람이었다. 경쟁도 나를 단단하게 만든 숫돌이었다. 젊은 날에는 그런 힘이 필요했다.


그런데 오래 걷다 보니 조금씩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앞사람의 등보다 내 옆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지가 중요해졌고, 무엇을 하나 더 얻는 것보다 이미 내게 와 있는 것들이 고마워졌다.


예전에는 실패하면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실패하고도 남는 것이 있었다. 공부였다. 시험에 떨어져도 공부한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었고, 부족함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보였다. 불합격이라는 짧은 결과 뒤에 생각보다 긴 배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험은 나를 평가하지만, 공부는 나를 확장한다. 합격은 기뻤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면서 넓어진 생각은 다음 일로 따라왔다.


한 분야에서 얻은 지식이 전혀 다른 곳에서 쓸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부터 시험은 합격증 하나를 얻기 위한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확인하고, 아직도 새로워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일이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모르는 것은 줄어들 줄 알았다. 살아보니 반대였다.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모르는 것의 둘레도 함께 넓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예전만큼 부끄럽지 않아 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 한마디가 조금씩 편안해졌다.


노자가 말한 "知不知上(지불지상)",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오히려 귀하다'는 뜻도 그제야 내 쪽으로 조금 가까이 걸어왔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젊은 날에는 좋은 뜻이라면 말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경험했으니 알려주고 싶었고, 잘못된 길이 보이면 바로잡아주고 싶었다.


회사에서도 그랬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 판단하면 빠르고, 내가 직접 하면 더 수월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기보다 대신 결정했고, 맡겨놓고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다시 손을 댔다. 그것이 바카라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내가 모든 것을 해버리면 다른 사람이 해볼 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사람은 가르친 만큼만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기다려준 만큼 자라기도 했다.


꽃이 빨리 피지 않는다고 봉오리를 손으로 벌릴 수는 없다. 볕이 들게 하고, 물을 주고, 때로는 바람을 견디도록 두어야 한다. 피어나는 것은 꽃의 몫이다. 사람도 그랬다.


그제야 노자의 무위(無爲)가 전과 다르게 읽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금 덜 해야 다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시작할 수 있는 순간을 알아보는 것.


노자의 문장은 예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문장이 아니었다. 내가 달라지고 있었다.


산에서도 비슷한 것을 배웠다.

젊어서는 정상에 오르는 일이 산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멀리 펼쳐진 능선을 내려다보면 힘들게 올라온 시간이 보상받는 듯했다.


그러나 산을 오래 걷다 보니 정상은 생각보다 잠깐이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사진 몇 장 찍고 나면 다시 배낭을 메어야 한다. 그리고 진짜 조심해야 할 길이 시작된다. 하산이다.


오를 때는 힘들어서 발밑을 잘 살핀다. 두 발에 힘을 주고 바위를 디디며 숨을 고른다. 하지만 내려갈 때는 마음이 먼저 느슨해진다.


‘정상에 다녀왔으니 이제 다 왔다.’


몸에는 피로가 쌓였는데 마음은 이미 산행을 끝낸 것처럼 풀어진다. 바로 그때 작은 돌 하나가 발을 흔들고, 젖은 낙엽 한 장이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산을 오래 다닐수록 나는 정상보다 하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잘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산행이 완성되지 않는다. 끝까지 잘 내려와야 비로소 한 번의 산행이 된다.


그 말이 어느 날 삶의 문장처럼 들렸다. 우리는 올라가는 법을 참 많이 배운다. 시험에 합격하는 법, 성공하는 법, 돈을 버는 법, 조직을 키우는 법, 남보다 앞서는 법. 그런데 잘 내려오는 법은 얼마나 배웠을까.


물러나는 법.

자리를 내어주는 법.

가졌던 것을 놓는 법.

내 생각이 틀렸을 때 고쳐 쓰는 법.

그런 공부도 삶에는 필요했다.


노자가 오래전부터 낮음을 이야기하고, 부드러움을 말하고, 채우기보다 비움을 이야기한 까닭을 나는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세월은 참 묘한 스승이다. 가르치겠다고 앞에 서지도 않는다. 시험지를 나누어주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서운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고, 때로는 뜻밖의 기쁨도 건넨다. 그러면서 오래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 하나를 어느 날 문득 알아듣게 한다.


젊은 날에는 ‘비우라’는 말이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의 위안처럼 들릴 수도 있다. ‘낮추라’는 말은 경쟁에서 물러나라는 말처럼 들리고, ‘다투지 말라’는 말은 세상살이에 너무 순진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보니 비움은 버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 안에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낮아짐도 작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낮은 곳에 서야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도 무조건 물러서는 일이 아니었다. 이기고도 잃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었다.


노자의 말은 늦게 이해되었다. 아니, 어쩌면 노자의 말이 늦었던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문장까지 걸어가는 데 오래 걸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공부한다. 여전히 시험에 도전하고,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쓴다. 산에도 오른다. 나이가 들었다고 배움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은 젊은 날과 조금 다른 이유로 공부한다.


예전에는 더 많이 알기 위해 공부했다면, 이제는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잊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

예전에는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시험을 보았다면, 이제는 아직 나 자신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카라상 앞에 앉는다.


예전에는 산 정상에 서기 위해 걸었다면, 이제는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궁금해서 걷는다.


배움도, 산행도, 글쓰기도, 결국 나를 조금씩 고쳐 쓰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 바카라은 노자를 설명하기 위한 바카라이 아니다. 『도덕경』을 정확하게 해설하려는 바카라도 아니다. 나는 노자의 말 앞에 내 삶을 놓아보고 싶었다.


시험장을 찾아가던 아침을 놓아보고, 불합격이라는 글자를 바라보던 순간을 놓아보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혼자 생각이 많았던 저녁을 놓아보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또 사람에게 위로받았던 날을 놓아보고 싶었다.


숨이 차 산길 바위에 걸터앉아 마셨던 물 한 모금도 그 곁에 놓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나씩 펼쳐놓고 보니 신기하게도 오래전에 읽었던 노자의 말 몇 마디가 그 장면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는 몰랐던 말이었다. 살아보니 알 것도 같은 말이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오래 살았다고 삶을 다 아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살아갈수록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진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었던 생각을 고쳐야 했던 적도 있었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의 사정을 뒤늦게 알게 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삶을 ‘알았다’고 말하기보다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완성된 사람이 되기보다 계속 고쳐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게 말할 수 있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생각을 다시 고칠 수 있는 사람. 생각에도 새순이 돋고, 마음에도 새 길이 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길 위에 있다. 아직 읽을 바카라이 있고, 도전해보고 싶은 공부가 있으며, 써보고 싶은 문장이 있다. 걸어보고 싶은 산길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바카라은 삶을 다 살아본 사람이 내리는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 걸어온 사람이 길섶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적는 중간 기록에 가깝다.


어쩌면 삶은 마지막까지 중간 기록인지도 모른다.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새로운 하루가 오고, 그 하루가 어제의 생각을 다시 고쳐놓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내가 노자를 읽는다고 생각했다. 한자를 읽고, 뜻을 찾고, 문장을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세월을 건너 다시 노자를 펼치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내가 노자를 읽어온 것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이 나에게 노자를 읽어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패가 한 구절을 풀어주었다. 사람이 또 한 구절을 가르쳐주었다. 산길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미처 몰랐던 뜻 하나를 몸으로 알려주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글자는 그대로인데 문장의 온도가 달라졌다. 머리에 머물던 말이 어느 날 마음으로 내려왔다.


그제야 알았다.

어떤 말은 읽는다고 곧바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아내야 비로소 뜻이 열리는 말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노자를 펼친다.


예전과 똑같은 글자 앞에,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내가 앉는다. 그리고 이제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살아보니, 이해되는 말들이 있었다. 그 말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이 바카라을 쓴다.

『살아보니, 노자의 말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