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수 한 모금

카를로비바리에서 프라하까지

by박계장

9월 15일 · 새벽 두 시 반, 화명동

여행을 떠나는 날에는 잠을 미리 자두어야 한다. 인천공항에 이른 아침 도착하려면 부산에서는 새벽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한밤중에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 하루 휴가까지 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짧게 잠이 들었지만, 정작 눈을 붙이려던 초저녁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짐을 챙기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행과 만나기로 한 시각이 가까워져서야 졸음이 몰려왔다.


새벽 두 시 반, 화명동에서 네 사람이 만나기로 했다. 나는 삼십 분쯤 먼저 나왔다. 그때까지 문을 열고 있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라떼를 샀다. 인천공항까지 가는 동안 출출하면 먹을 생각이었다. 누구 하나 늦지 않았다. 일곱 명이 탈 수 있는 카니발에 네 사람이 타니 자리는 넉넉했다. 후배 둘이 번갈아 운전하는 동안, 나와 친구는 뒷자리에서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어디에서 끝났는지는 모르겠다. 공항이 가까워져서야 잠에서 깼다.


이번 여행은 한 번 멈췄던 여행이다. 원래는 오월에 떠날 예정이었다. 신청서를 쓰고 심사를 거쳐 선정됐지만, 중동 전쟁 여파로 해외연수가 보류되었다. 항공편을 취소하고 한동안 열지 않았던 일정표를 다시 펼친 것이 몇 달 뒤였다. 시청 근처 작은 커피숍에서 네 사람이 동유럽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온천자원의 관리와 관광지의 보건·위생·안전 환경을 살피는 연수였고, 공식 일정 사이에 어디를 걸을지도 함께 의논했다.


나를 이 여행으로 이끈 친구와는 2007년에도 유럽을 함께 다녀왔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같이 여행을 가보자는 그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공항에서도 한바탕 웃을 일이 생겼다.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해외여행 카드를 같이 준비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사용 실적이 몇천 원 부족했다. 결국 삼만 사천 원을 내고서야 뷔페로 차려진 음식을 먹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왔다. 카드 관리 잘못하면 혼자 편의점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고 일행에게 농담을 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 말을 기억한 일행들이 웃었다. 멀리 가기도 전에 이야기 하나가 생겼다.


열두 시간 가까운 비행은 길었다. 한참 잤다 싶어 시계를 보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영화를 몇 편 보고, 기내를 돌아다니다 맥주도 한 잔 마셨다. 프라하 공항에 내려 짐을 찾고 미리 예약한 렌트카를 받았다. 첫 목적지는 카를로비바리였다. 숙소에 짐을 풀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카를로비바리 첫날, 야경


9월 16일 · 체코에서 떠올린 오색약수

아침에는 친구와 먼저 밖으로 나왔다. 둘 다 일찍 잠이 깬 탓이었다. 전날 밤 어둠 속에 있던 건물들이 아침에는 각자의 색을 드러냈다. 테플라천을 사이에 두고 건물들이 이어졌고, 물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온천수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작은 도자기 주전자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낯선 모습인데, 그들에게는 익숙한 아침의 일이었을 것이다.

테플라천을 따라 이어지는 카를로비바리의 전경


밀 콜로나다의 기둥 사이에는 온천수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온천이 있다고 하면 먼저 목욕탕을 떠올리던 내게, 물을 받아 마시며 도시를 걷는 모습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물이 나오는 자리와 사람들이 쉬는 회랑, 그 앞을 지나는 길이 한곳에 있었다. 연수계획서에서 읽던 온천자원의 이용환경이라는 말도 이런 자리에 와서야 구체적으로 보였다.

밀 콜로나다의 회랑


우리도 온천수를 손으로 받아 마셨다. 제법 뜨거웠다.

밀 콜로나다 안의 온천수 음용 시설


그 물을 마시는데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 생각났다. 친구와 설악산에 갔을 때였다. 오색약수터에서 작은 종지컵으로 물을 떠 큰 물통에 옮겨 담았다. 이 리터쯤 되는 물을 들고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의상대 야영장으로 갔다. 그 물로 라면을 끓였다. 면이 유난히 강력밀가루로 만든 것처럼 찰졌고, 냄새와 맛도 보통 물로 끓였을 때와 달랐다.


카를로비바리에서 본 온천수 시설이 그 약수터를 떠올리게 했다. 맛이나 약수터 주변이 녹이 슨 것 처럼 붉은 것이 비슷했다. 뜨거운 물 한 모금에, 무거운 물통을 들고 다니던 젊은 날이 따라왔다. 그때에는 무게가 얼마인지 따지기보다 그 물로 라면을 끓여 먹을 생각이 먼저였을 것이다. 이렇게 먼 곳에 와서 오래전 한 끼를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날의 사진을 보면 오후에는 성 베드로와 바울 정교회의 금빛 돔을 바라보았고, 밤에는 그랜드호텔 퍼프 앞에도 섰다. 물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과 회랑, 성당과 호텔이 하루 안에 담겼다. 건물의 이름을 일정표에 적을 때와 사진으로 다시 볼 때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르다. 이제는 그 앞에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성 베드로와 바울 정교회의 금빛 돔


9월 17일 · 물을 마시던 도시에서 맥주를 마시는 도시로

다음 날에는 카를로비바리를 떠나 플젠으로 갔다.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을 둘러보았다. 전날에는 물이 나오는 자리를 살폈고, 이날에는 맥주를 만드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지하 저장고에는 커다란 나무통들이 놓여 있었다. 높은 천장과 길게 이어지는 통들이 사진에 남아 있다.

플젠의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지하 저장고


그곳에서 네 사람이 맥주잔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확대해 보니 잔보다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산에서는 커피잔을 가운데 놓고 지도를 보던 사람들이, 체코의 지하 저장고에서는 맥주잔을 들고 서 있다. 출발이 미뤄졌을 때만 해도 이 자리에 정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정표의 도시 이름은 여러 번 읽었지만, 그 이름 아래 우리가 들어가 있는 모습은 미리 볼 수 없었다.


양조장에서는 시음할 맥주를 제공해 주었다. 조금 전까지 나무통 안에 있던 맥주가 우리 손의 잔에 담겨 있었다. 커다란 통을 뒤로하고 네 사람이 맥주잔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잔 위에는 흰 거품이 올라와 있었다. 양조장을 둘러보다가 그곳에서 숙성되던 맥주를 맛보니, 맥주를 만드는 공간이 한결 가까워졌다.

플젠 맥주 양조장에서 시음용 맥주 한잔


오후에는 체스키크룸로프에 닿았다. 성에서 내려다보니 붉은 지붕들이 물길을 따라 모여 있었다. 높은 곳에서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붕과 다리, 강의 굽이를 한 장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려와 골목에 들어서면 아까 내려다보던 풍경은 다시 집 한 채와 길 하나의 크기가 된다. 사진을 여러 장 찍어도 두 모습이 한꺼번에 담기지는 않았다.

성에서 내려다본 체스키크룸로프의 붉은 지붕과 강


9월 18일 · 마을의 아침에 잠깐 앉다

체스키크룸로프의 다음 날 사진은 아침 일곱 시 무렵부터 시작된다. 전날 저녁에 보았던 성과 강에 다른 빛이 닿아 있었다. 하루를 묵고 다시 보는 도시에는 전날의 장면이 조금 겹쳐 있다. 처음에는 건물의 모양을 보았다면, 다음 날에는 어제 어디에서 그 건물을 바라보았는지도 함께 떠오른다.

체스키크룸로프의 성과 강


아침 산바카라을 마치고 미리 신청해 둔 조식을 먹으러 갔다. 조식은 숙소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근의 음식점으로 가서 먹는 방식이었다. 음식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갈했다. 커피도 맛있었다. 여행 중에 먹은 아침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도, 이곳의 식탁은 사진을 보자 금세 떠오른다.

숙소 인근 음식점에서 먹은 조식. 빵과 달걀, 과일, 커피가 놓인 식탁


그곳은 우리 같은 관광객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아침을 먹으러 오는 곳인 듯했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아침을 먹는 분위기가 좋았다. 낯선 도시를 둘러보다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루 곁에 잠깐 앉은 기분이었다.


현지인들도 찾는 곳인 듯했던 분위기가 좋았다. 전날에는 성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보이던 것은 붉은 지붕과 물길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그 마을의 음식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지붕 아래에는 이렇게 아침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진 한 장에 담았던 마을이 식탁 가까이로 다가온 듯했다.

커피잔과 접시 사이로 함께한 여행 첫날의 아침 식사


식사를 마친 뒤에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정갈한 접시와 맛있었던 커피, 다른 손님들과 함께 앉아 있던 식당의 분위기가 그 아침의 기억에 더해졌다. 이날 우리는 체스키크룸로프를 떠나 다음 나라로 향했다.


9월 21일 · 다시 프라하, 처음 걷는 거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거쳐 프라하로 돌아왔다. 처음 체코에 들어왔을 때는 공항에서 곧장 카를로비바리로 갔다. 그 때문에 기대했던 프라하 거리를 걷는 일은 여행 말미에 와서야 시작했다.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장치가 붙어 있는 벽 아래에서 고개를 든 사람들, 사진을 찍으려고 자리를 잡는 사람들, 그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화면에 들어왔다. 유명한 시계를 보러 왔는데 사진에는 그 앞의 사람들도 함께 남았다. 시계만 따로 떼어 담을 수 없는 자리였다.

프라하 구시청사의 천문시계


오후에는 카를교를 걸었다. 다리 위에는 우리처럼 사진을 찍고, 강을 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래된 다리 위로 사람들의 오늘이 지나가고 있었다.

카를교를 걷는 사람들


9월 22일 · 마지막 아침

마지막 날 아침에 프라하 구시가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며칠 사이 온천도시를 걷고, 양조장에 들어가고, 성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나라들을 거쳐 다시 이곳에 왔다. 오래 준비한 여행이 어느새 마지막 아침에 닿아 있었다.

프라하 구시가지 모습


돌아와 체코 사진을 넘기다가 카를로비바리의 온천수 앞에서 멈췄다. 그 물을 마시며 떠올렸던 것은 친구와 물통을 들고 다니며 끓여 먹은 라면이었다. 그때는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이었다. 필름값도 인화비도 부담이라 남은 사진이 별로 없다. 그런데 친구와 텐트 앞에서 먹었던 라면의 찰진 질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번에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진 속 건물 이름 몇 개는 잊을 것이다. 어느 날 어디에 갔는지도 사진을 보고서야 알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새벽부터 번갈아 운전하던 후배들, 뒷자리에서 친구와 나누던 옛이야기, 프라하 천문시계 앞에서 함께 얼굴을 모아 기념사진을 찍던 순간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사진에 다 담기지 않은 일들도 떠올리며, 나는 사진을 한 장씩 천천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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