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하루 보내세요.

한 번 멈췄던 여행을 다시 기다리며, 작은 카페에서 쌓인 시간

by박계장

요즘 우리는 아침에 시청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자주 만난다. 9월 중순으로 예정된 해외연수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 방문 일정이 끝난 뒤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도시와 도시 사이는 어떻게 이동할지, 그곳까지 갔으니 무엇은 꼭 보고 와야 하는지를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의논한다. 출근한 뒤 잠깐 시간을 맞춰 만나는 자리라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면 챙겨야 할 일이 하나둘 생긴다.

이번 여행은 한 번 멈췄던 여행이다. 우리가 다녀올 곳은 체코와 헝가리다. 원래는 5월 초에 떠날 예정이었고, 심사를 거쳐 어렵게 연수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나는 일자별 일정과 방문기관 정보, 숙소 연락처에다 현지에서 쓸 수 있는 짧은 회화까지 넣은 여행일정 앱을 만들어 일행들에게 돌렸다. 그 무렵 우리는 일정표를 너무 많이 들여다본 나머지 “벌써 한 번 다녀온 것 같다”고 웃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외연수가 잠정 보류되었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중동 전쟁 여파로 공무 국외출장이 제한되면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쉬움은 컸고, 이러다가 아예 취소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예약했던 항공편을 취소했고, 빼곡히 적힌 여행 일정표도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 연수를 다시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몰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출발일이 9월 15일로 정해지고 필요한 절차가 하나씩 진행되면서 이번에는 정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경비지원 요청서도 해당 부서로 보냈다. 이제 출발을 일주일쯤 앞두고 연수 경비가 개인별 계좌에 들어오면 떠나기 전 행정절차도 사실상 끝난다.


우리가 모이는 카페는 시청에서 멀지 않은 작은 가게다. 아침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넓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네 사람이 둘러앉아 이야기하기 좋다. 처음에는 그저 가까운 데다 한적해서 찾았는데 거의 매일 얼굴을 비치다 보니 어느새 젊은 사장도 우리를 알아본다. 가끔 주문하지 않은 조각 케이크를 내놓으며 맛보라고 하고, 손님이 뜸할 때는 커피를 직접 테이블까지 가져다주기도 한다.


커피를 유난히 가득 담아주는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잔 가장자리까지 찰랑거리는 커피를 쟁반에 올려놓고 사장이 천천히 걸어오면 고맙기도 하지만 보는 내가 조마조마하다. 예전에 한 번은 커피가 잔 밖으로 넘쳐 “왜 이렇게 많이 담아오셨어요. 힘들게”라고 말한 적도 있다. 사장은 별말 없이 웃었다. 그 뒤로도 커피의 양은 줄지 않았다.

{7B0A8FC1-77F6-4CC3-B3AB-13A02F54D2C2}.png

일행 가운데 유난히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지는 친구가 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서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몇 번 얼굴을 마주치면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지낸다. 우리와 카페 사장이 보통의 손님과 주인 사이보다 조금 더 살갑게 인사를 나누게 된 것도 그 친구 덕분인 듯하다. 나는 낯선 사람과 가까워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그럴 때면 그 친구의 서글서글한 성격이 조금 부럽다.


며칠 전 아침에도 커피를 다 마시고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잘 마셨어요”라고 말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던 그 친구는 카운터에 있던 사장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내게는 익숙한 인사가 아니었다. 나는 가게를 나서면서 대개 “수고하세요”나 “잘 먹었습니다” 정도의 인삿말을 건넨다. 그런데 그날은 상대방의 남은 하루가 좋기를 바란다는 그 말이 새삼 다르게 들렸다. 사장도 잠깐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금세 웃으며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곳에서 여행을 참 오래 준비했다. 5월에 떠나기로 했을 때부터 한 차례 여행이 멈추고 다시 출발 날짜가 정해진 지금까지 여러 번 그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프라하의 골목을 이야기했고, 카를로비바리의 온천을 찾아보았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어디에서 야경을 볼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비행기를 타지 않았지만 이 작은 카페에는 우리의 여행에 대한 추억이 제법 많이 쌓였다.

{9B08ED16-E9FD-4C82-A4F7-E7F3FD7D8338}.png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돌아올 때 카페 사장을 위한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해야겠다. 거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의 어느 가게를 둘러보다 여행지가 떠오르는 작은 물건을 발견한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몇 달 동안 우리는 그 카페에 모여 여행을 준비했고, 사장은 때때로 조각 케이크를 내어주고 커피잔을 넘칠 만큼 채워주었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대신 우리가 다녀온 곳의 작은 흔적 하나를 건네도 좋을 것 같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체코에서 무엇을 보고 헝가리에서는 어디를 걸을지만 생각했다. 아침마다 지도를 펼치고 일정을 바꾸다 보니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의 거리 이름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런데 출발할 날이 가까워지면서 그동안 우리가 여행을 준비해 온 이 카페도 전과 조금 다르게 보인다. 함께 커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와 웃음, 잔이 넘치지 않도록 쟁반을 조심스레 들고 오던 젊은 사장의 모습까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곧 우리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한 번 멈췄던 여행이라 출국장을 지나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해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체코와 헝가리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올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지금 열심히 찾아둔 장소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작은 장면 하나가 오래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에도 우리는 아마 그 카페에 앉아 여행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커피를 다 마시고 문을 나설 때는 이번에는 그 친구보다 내가 먼저 말해볼 생각이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저녁에 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