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뭐해

故 이병문 전 부산 중구 부구청장 1주기를 맞아

by박계장

해가 기울 무렵이면 메신저 창에 그의 이름이 뜨곤 했다.


“저녁에 뭐 해?”


하루 전도 아니고 당일이었다. 그것도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별다른 일이 없다고 답하면 그는 같이 가자고 했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했던 그의 저녁에는 늘 누군가가 함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늘로 1년이다. 퇴직하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좋아하던 산에도 다니고, 함께 가자고 여러 번 말했던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을 줄 알았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미뤄 두었던 일도 하나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퇴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찾아왔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지 않았다.


나는 20년 전 시청으로 전입해 그를 처음 만났다. 같은 팀 선임이었던 그는 복잡한 일도 쉽게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일도 그가 들여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가닥이 잡혔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내가 걱정을 늘어놓으면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시간 가면 다 해결돼. 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후배의 걱정을 말로만 달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에서 막혔는지 살펴보고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필요하면 직접 나서기도 했다. 지금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 말을 떠올린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걷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경성대학교 근처 집에서 연산동 시청까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걸어서 출근했다. 지하철을 타도 삼십 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어느 금요일에는 퇴근하는 직원들과 시청 맞은편 황령산에 올랐다. 산을 넘어 대연동으로 내려와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신 뒤에는 사람들을 다시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혼자 걷기보다 사람들과 함께 걷고, 먹고, 오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토요일이면 가까운 사람들과 부산 근교의 산을 찾았다. 한번 정한 산행 약속은 날씨가 좋지 않아도 쉽게 바꾸지 않았다. 재약산에서는 정상 부근의 거센 바람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달음산에서는 가랑비를 보고 길을 나섰다가 폭우를 만나 바위틈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옷과 배낭이 흠뻑 젖은 날에도 다시 걷기 시작하면 그는 어느새 앞쪽에 있었다. 산에 가면 나는 그의 등을 따라 걷는 일이 많았다.


투병 중이던 마지막 봄에도 우리는 함께 걸었다. 그를 따르던 후배들과 송정에서 미포로 이어지는 동해남부선 옛 철길을 걸었다.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거의 빠진 그는 털실 비니를 쓰고 있었다. 늘 든든해 보이던 어깨는 눈에 띄게 좁아졌고, 살이 빠져 헐거워진 바지는 허리띠를 한참 조여 매야 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지만 그날의 모습은 내가 알던 그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후배들이 괜찮다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그는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했다. 예전부터 함께 밥을 먹으면 남보다 먼저 계산대로 가던 사람이었다. 몸은 많이 야위었지만 그런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식당을 나와 헤어지려는데 그는 대연동 집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릴 길이었다. 수영 팔도시장에서 우리와 인사를 나눈 뒤 그는 혼자 걸어갔다. 걸음은 예전보다 느렸다. 비니를 쓰고 허리띠를 단단히 조여 맨 그의 뒷모습이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조금씩 멀어졌다.


그래도 그때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치료가 끝나면 다시 산에도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술은 예전만큼 마시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을 불러 밥 한 끼쯤은 함께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날 헤어질 때도 특별한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날이 그와 함께 걸은 마지막 날이 될 줄은 몰랐다.


20년 가까이 함께 지낸 만큼 그와의 기억은 내 생활 곳곳에 남아 있다. 함께 갔던 식당이나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걱정하지 마”라던 그의 말이 떠오르고,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던 그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휴대전화도 가끔 지난 사진 속의 그를 보여준다. 산 정상 표지석 앞에서 찍은 사진이나 등산을 마치고 식당에서 찍은 사진이 잠금 화면에 불쑥 뜰 때가 있다. 사진 속 그는 대부분 여러 사람과 함께 웃고 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메신저 창에도 눈이 간다. 예전에는 그 시간쯤이면 그의 이름과 함께 늘 같은 말이 떠 있었다.


“저녁에 뭐 해?”


오늘은 유난히 그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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