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는 잊히고, 사람은 남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목덜미를 누르는 느낌에 눈이 떠졌다. 등줄기와 코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안방 블라인드 틈새로 보이는 바깥은 여전히 짙은 어둠이었고, 머리맡 핸드폰을 들자 어두운 방 안으로 푸르스름한 액정 빛이 번졌다. 화면 상단은 새벽 세 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잠들기 전 맞춰둔 에어컨 타이머가 꺼진 직후였다.
스마트폰의 에어컨 앱을 열어 켜짐 버튼을 누르자, 잠시 후 맞은 편 벽에 붙은 에어컨에서 미미한 접속음과 함께 찬 바람이 낮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미 한번 깬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요즘 밤은 늘 이런 식이다. 아파트 외벽과 베란다 유리창은 온종일 햇볕을 한가득 머금고 열기를 품어둔다. 해가 지고 바깥 공기가 조금 누그러져도, 낮 동안 콘크리트에 켜켜이 쌓인 열기는 밤이 깊어도 집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밤새 에어컨을 틀어놓기엔 다음 달 관리비 고지서가 신경 쓰여 결국 앱 화면에서 종료 예약 시간을 네댓 시간 뒤로 맞춰두고 만다. 그 정도 돌아가면 서늘해진 공기의 여운으로 남은 밤을 버틸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몸은 귀신같이 더위를 알아채고 에어컨이 꺼지자마자 눈을 뜨게 만든다.
나이가 들며 잠의 깊이가 얕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한번 들면 아침까지 내처 잤는데, 요즘은 작은 온도 변화에도 쉽게 깨고 다시 청하는 잠도 들쑥날쑥이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누워 있다 보니, 문득 아주 오래전 여름밤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에어컨은커녕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는 단칸방이었다. 더위를 식힐 수단이라곤 밤새 고개를 저으며 웅웅거리던 선풍기 한 대가 전부였다. 선풍기가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얼굴에 바람이 몇 초간 닿았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짧은 바람 한 줄기로 어떻게 그 긴 여름을 넘겼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다.
저녁을 일찍 먹고 나면 동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 식구들도 대문을 나섰다. 골목 어귀에는 누군가 공사장 자재를 모아 만든 낡은 나무 평상이 있었다. 평상 위엔 노란 베니어장판이 덮여 있었는데, 한낮의 햇볕을 온통 흡수한 장판은 초저녁까지 엉덩이가 뜨끈할 정도로 열기를 품고 있었다.
평상엔 늘 먼저 나온 이들이 있었다.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들과 하루의 살림살이를 나누는 아주머니들, 골목을 내달리다 목이 말라 돌아온 아이들. 누구 하나 자리를 지정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엉덩이를 조금씩 밀어내면 한두 명쯤 앉을 공간이 기어이 생겨났다. 단칸방에선 꼼짝도 하기 싫던 더위였는데, 사람들의 숨소리와 섞여 앉아 있으면 견딜 만해졌다.
어떤 날은 누군가 우물물에 담가두었던 수박 한 통을 들고 나왔다. 칼끝이 닿자마자 쩍 소리를 내며 붉은 속살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을 타고 찬 수박물이 손목까지 흘렀고, 검은 씨는 입안에서 골라내어 골목길 바닥으로 퉤퉤 뱉어냈다. 한 통을 십수 명이 나누어 먹었으니 제 몫은 작았지만, 그 단맛은 모자라지 않았다.
수박이 없는 날엔 송곳으로 깨뜨린 자갈 같은 얼음을 양푼에 가득 담고 미숫가루를 탔다. 국자로 저을 때마다 얼음이 양푼 벽에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소하고 달달한 음료를 마시고 나면 입가에 덜 풀린 가루가 허옇게 묻었고, 서로 그 얼굴을 보며 낄낄거렸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밤이 깊어도 끝이 없었다. 담벼락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사람 수만큼 흔들리던 부채질 소리. 그 사그라지지 않는 소음들을 자장가 삼아 평상 한구석에 누워 있으면, 어느새 밤은 깊어가고 공기 끝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더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여럿이 모여 시끌벅적 놀다 보면, 더위를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단호히 사양할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방 안의 온도를 바꾸는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하다. 옛날이 무조건 좋았다고 미화할 만큼 지난 세월을 서정적으로만 되새기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도 분명 지금처럼 더웠을 텐데, 이상하게 더위에 대한 기억보다 사람들의 얼굴과 얼음 깨지는 소리, 붉은 수박 속살이 먼저 떠오른다. 찜통 같던 단칸방의 답답함은 아득히 시들어 사라지고, 노란 베니어장판 위로 엉덩이를 서로 밀어붙이며 앉아 있던 그 풍경만 또렷하게 남았다.
에어컨 바람이 다시 방 안을 서늘하게 채웠다. 목덜미의 땀은 말랐고, 블라인드 틈새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에 베란다 문을 열었을 때 바람 끝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날이 올 것이다. 매미 소리가 줄어들고, 잠들기 전 에어컨 앱을 켜지 않아도 되는 밤 역시 찾아올 것이다. 어린 날의 지독했던 더위를 잊고 노란 장판과 수박 맛만 기억하듯, 올해의 이 아득한 여름도 몇 장면만 남긴 채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내가 여태 지나온 그 숱한 여름들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