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게, 더 빠르게 구르는 눈덩이를 위해
봉급날이면 통장에 들어온 돈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생활비와 대출금으로 나뉘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출금이 먼저 빠져나갔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돈이 그 뒤를 따랐고 관리비와 카드값, 보험료도 제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활하고 남은 돈으로 빚을 조금씩 갚으며 살았다.
빚을 모두 갚은 지 이제 2년 남짓이다.
그전까지 저축이나 투자는 내게서 늘 멀리 있는 이야기였다. 수익을 조금 더 낼 수 있다면 대출금을 천천히 갚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빚부터 없애기로 했다. 월급은 이미 갈 곳이 정해져 있었고, 남은 돈이 생겨도 다음 달을 위해 두어야 했다.
빚을 다 갚고 나서야 사정이 달라졌다. 은행에 돈을 넣어 두는 것만으로는 몇 년 앞으로 다가온 퇴직 이후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증권사 계좌를 만들고 ETF 투자를 시작했다. ISA, IRP, 연금저축 같은 이름들도 그때부터 내 생활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지나쳤을 금융 기사와 유튜브 방송을 이제는 메모까지 하며 들여다본다. 얼마 전부터 내 유튜브 화면에는 연금과 ETF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투자가 처음은 아니다. 20여 년 전 중국과 인도, 러시아와 브라질이 빠르게 성장한다며 관련 펀드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나도 그 흐름에 올라탔다. 대출이자로 나가는 돈보다 투자해서 얻는 수익이 크다면 대출금을 조금 늦게 갚아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해마다 큰 폭으로 올랐다는 펀드는 막상 내가 가입한 뒤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실이 30퍼센트 가까이 되었을 때 결국 정리하고 시장을 떠났다. 줄곧 오르던 것이 왜 내가 사고 나니 떨어지는지 그때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야간 대학원에서 슬롯복지를 공부하고 있었다. 교수님 한 분이 온라인 게임인이던 학생들에게 자신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우량주를 오래 보유한다고 했다. 퇴직한 뒤 다시 돈을 벌려고 애쓰기보다 젊을 때부터 좋은 기업에 투자하며 노후를 준비하라는 말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였지만 당시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투자에서 이미 한번 크게 손해를 본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투자를 잊고 지냈다. 빚을 갚는 일이 내게는 가장 확실한 재테크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퇴직을 몇 년 남겨 두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요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미국 주식과 ETF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누군가는 얼마를 벌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때 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나도 조금 흔들린다.
그래도 이번에는 오래 버틸 수 있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크게 오르는 종목을 찾아다니기보다 미국 지수를 따라가는 ETF에 매달 일정한 돈을 넣는다. 다른 사람의 종목이 크게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크게 데어 본 사람에게는 빨리 가는 길보다 중간에 내려서지 않을 길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투자를 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수익률보다 시간이었다.
복리에는 원금과 수익률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원금은 넉넉하지 않고 수익률은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퇴직까지 남은 시간은 4년 6개월 정도다. 젊은 시절부터 연금계좌에 돈을 넣어 오랫동안 투자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도 그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 오히려 온라인 게임생활을 시작하던 무렵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물려받았고, 그것을 갚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봉급날이면 통장에 들어온 돈에서 대출금이 먼저 빠져나갔다. 잔액이 금세 줄어든 통장을 바라보며 허탈했던 날도 있었고, 내가 만든 빚이었으면 차라리 덜 억울했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에도 그 빚은 우리 집 살림 한쪽에 오래 남아 있었다.
부모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가끔 생각한다. 그때 빚을 갚는 대신 돈을 모아 오랫동안 투자할 수 있었다면 지금 내 계좌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해봐야 소용없는 계산이다.
요즘 나는 AI에게 이런 계산을 자주 시킨다. 지금 가진 돈이 얼마이고 매달 얼마씩 넣는다면 70세에는 얼마가 되고, 80세에는 얼마쯤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수익률을 몇 퍼센트로 잡느냐에 따라 숫자는 금세 달라진다. 화면에는 매년 조금씩 높아지는 그래프도 나타난다.
나는 그 그래프대로 미래가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20여 년 전에도 오르기만 할 것 같던 펀드가 내가 가입한 뒤 떨어졌다. 그럼에도 가끔 그래프의 끝을 오래 바라본다. 70세와 80세라는 숫자가 화면 저편에 놓여 있다.
퇴직한 뒤에도 투자는 계속해 볼 생각이다.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한 뒤 받게 될 연금이 있고, 공제회에 넣어 둔 돈도 있다. 생활에 필요한 돈을 쓰고 여유가 생긴다면 많지 않더라도 계속 계좌에 넣어 볼 생각이다. 젊은 시절에는 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라도 오래 해보고 싶다.
내가 돈을 모으는 이유도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
나는 자식들에게 큰 재산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내가 남긴 것을 얼마나 고마워할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내게 물려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을 건네주고 싶다. 많지는 않더라도 빚이 아닌 돈을 남기고 싶다.
오늘도 계좌에 정해 둔 돈을 넣는다. 이번 달에 넣은 돈이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가끔 AI가 그려 준 그래프의 오른쪽 끝을 본다. 거기에는 여든 살의 내가 있다.
그때의 나는 오늘 넣은 이 돈을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