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바카라, 선생님
바카라꽂이 한쪽에는 오래된 바카라 한 권이 꽂혀 있다.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선물해 주신 바카라이다. 내 곁에 온 지 40년이 넘었다.
삼백 쪽이 훌쩍 넘는 바카라의 종이 단면은 누런빛을 지나 짙은 갈색에 가까워졌다. 종이들이 겹겹이 포개진 자리에는 노인의 검버섯 같은 얼룩이 여기저기 박혀 있다. 바카라을 펼치면 마른 먼지와 오래 닫아 둔 나무 서랍 냄새가 섞인 듯한 냄새가 올라온다. 뒤표지 안쪽에는 ‘탐구서점’이라는 이름이 찍힌 작은 종이 딱지가 아직 붙어 있다. 그 작은 딱지는 이 바카라도 나처럼 오래전 어느 자리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 주는 것 같다.
공무원은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월급은 정해진 날에 들어왔고, 해고를 걱정하며 출근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월급이 밀리지 않는다는 것과 그 월급으로 생활이 여유로웠느냐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얼마 전에는 자동차 회사 생산직에 종사하는 직원이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부러움 섞인 말로 회자되었다. 최근에는 반도체 업계의 실적이 좋아지면서 생산직 종사자들도 몇 억씩 성과급을 받는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삼십 년 넘게 공직에 몸담아 온 사람의 급여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 업종의 특별한 시기에 만들어진 결과일 뿐, 모든 사람의 삶을 재는 보편적인 잣대는 아닐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 이 길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중학교 3학년 어느 봄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겠다고 하셨다.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모든 학생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해 내가 가정방문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우리 집은 작은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붙은 단칸방이었다. 비슷한 방들이 골목 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삼십여 호의 집들이 같은 번지를 나누어 쓰며 살았다. 형편이 조금 나은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이 있으면 이불이나 옷가지를 올려둘 수 있었고, 다 큰 아들에게는 그나마 혼자 몸을 누일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우리 집에도 다락이 있었다. 겨울이면 온기가 닿지 않아 이불을 몇 겹이나 덮어도 발끝이 시렸고, 여름이면 슬레이트 지붕에 고인 열기가 한밤까지 내려왔다.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할 나이였던 내게 그 다락은 방 한 칸짜리 집에서 겨우 내 몫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였다.
앞서 가정방문을 마친 친구가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 집까지 왔다. 선생님은 방 안으로 들어와 몇 걸음이면 벽에 닿을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둘러보셨다. 가정방문이라면 부모님을 만나야 했지만, 그날 우리 집은 그럴 수 없었다. 부모님은 일을 나가고 집에 계시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처지에 선생님이 오신다고 일을 쉬며 기다릴 형편은 아니었다.
그날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말보다 방 안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남아 있다. 장롱은 오래되어서인지, 안에 든 옷가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인지 바닥 쪽 모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기울기를 맞추려고 한쪽 받침 아래에는 화투짝 십 여장이 겹쳐져 고여 있었다. 좁은 단칸방의 세간치고는 조금 낯선 진열장도 있었다. 그 안에는 『조선왕조실록』, 『대망』 같은 두꺼운 시리즈물이 꽂혀 있었다. 노란색 비닐장판이 깔린 방 한쪽, 아랫목에는 연탄불의 열기에 검게 눌어붙은 자리가 있었다. 한 사람이 앉을 만한 크기의 탄 자국이 장판 위에 번들거리며 남아 있었다.
그 좁은 방 안에서 여섯 식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남의 눈을 통해 처음 본 것 같다. 그때까지 나는 가난이라는 것을 크게 의식하지 못했다. 앞집도, 뒷집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들 비슷하게 살다 보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방 안의 물건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내게 익숙했던 냄새와 얼룩과 좁은 방이, 바깥 사람의 눈에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게 되었다.
가정방문 이후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따로 부르셨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교사용으로 배포한 참고서와 학습자료를 건네주셨다. 어느 날은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을 내미셨다. 선물이라고 하셨다. 그 바카라이 바로 지금도 내 바카라꽂이에 꽂혀 있는 바카라이다.
선생님이 왜 하필 그 바카라을 고르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방을 보고 마음이 쓰이셨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바카라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여겨보셨던 것인지 지금도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 바카라은 40년이 넘는 세월을 나와 함께했다. 고등학교 기숙사에도, 결혼 뒤 몇 차례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늘 내 곁에 있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진학 상담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내게 왜 인문계로 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기술을 배워 빨리 슬롯에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해운대 쪽의 공업고등학교를 권하셨다.
나는 그때 대전에 있던 공군기술고등학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싫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는 그 모습이 무서웠고, 조금 자란 뒤에는 다른 두려움이 생겼다. 어느 순간 내 덩치가 아버지보다 커져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술을 핑계로 주정하는 아버지를 향한 내 안의 분노가 무서웠다. 그 감정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 올까 봐 겁이 났다.
그 집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은 군 관련 학교는 군대나 마찬가지라며 말리셨다. 부산기계공고가 학교 이미지도 좋고 학비도 무료이니 그곳이 어떠냐고 하셨다. 내게는 그 학교에 기숙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도 선뜻 다른 길을 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집 형편을 직접 본 사람이었다. 한 반에 학생이 거의 일흔 명이었고, 한 학년이 열네 반이나 되는 큰 학교였다. 선생님이 아이들 마음속까지 다 들여다보기에는 교실이 너무 붐볐다. 선생님이 본 것은 우리 집 형편이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공은 기계제도였다. 드래프터를 움직여 켄트지 위에 선을 긋고 도면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대충 대충하는 것 같은 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실습실에 들어서면 가슴이 답답했다. 60여 명이 넘는 한 반에서 서너 명에게만 주어지는 최하위 등급 ‘미’는 늘 내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밑자리를 깔아 주는 고마운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학교생활에 점점 흥미를 잃고 이런저런 바카라 읽기에 빠져 있었다. 영화도 좋아해서 한 자리에서 같은 영화를 두 번씩 보는 일이 예사였다. 기계 도면보다 소설 속 사람들이 더 궁금했고, 실습실의 형광등보다 극장의 어둠 속이 더 편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쪽으로 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셈을 해보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자격증은 어찌어찌 하나 얻었지만, 그것으로 밥벌이를 할 만큼 실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집안 형편은 입학할 때보다 나아지지 않았고, 그래서 대학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군대에 갔다. 전역하고 돌아왔을 때 내 앞에 놓인 길은 많지 않았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공무원 시험이었다. 두어 달 동안 수험서를 붙들고 공부했고, 그렇게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 보니 공직이 내게 잘 맞았다.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해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내가 검토하고 다듬은 규정과 조례가 많은 사람들의 생활과 지역슬롯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도 자부심이 생겼다. 처음부터 바라던 길은 아니었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실습실에서 그렇게나 굳어 있던 몸이 구청에서는 날랬다. 보고서를 쓰고 계획서를 다듬는 일을 즐기며 했다. 물론 그 길이 늘 편했던 것은 아니다. 민원인의 거친 말 앞에서도 똑같이 맞받아칠 수는 없었고, 열 번도 더 고친 계획서를 두고 방향은 제시하지 않은 채 비난만 하는 상사를 대할 때면 무너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모두 헛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쌓였다.
이제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퇴직이 멀지 않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굶지도 않았다. 정해진 날에 월급이 들어오는 동안 아이들이 자랐고, 나도 함께 늙었다. 돌아보면 공직은 다른 대안이 없어 들어선 길이었다. 그러나 막상 걸어 보니 그 안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오래 붙들고 갈 만한 보람도 있었다.
서점 앞을 지날 때면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선물해 주셨던 『지와 사랑』이 떠오른다. 그 바카라에 붙어 있는 탐구서점 딱지는 내 어린 시절의 좁은 방과, 나를 잠깐이라도 눈여겨보아 준 어른의 따뜻한 마음을 함께 붙들고 있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지나온 뒤에야 나는 글 쓰는 일이 내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나는 그 바카라을 꺼내 뒤표지 안쪽을 펼쳐 본다. 오래된 딱지는 가장자리가 삭아 바스러 지고 있지만,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교무실에서 바카라을 건네던 선생님은, 내가 글쓰기를,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라는 것을 아셨을까. 바카라의 뒤표지 안쪽에 붙은 ‘탐구서점’ 딱지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바카라을 처음 받던 날을 떠올린다. 그 바카라은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과, 그런 나를 한 번 더 눈여겨봐 준 선생님의 마음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딱지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그날의 마음도 내 안 어딘가에 아직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