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아무리 유능해도 마지막 선택은 내 몫이다.
퇴근 시간이 한 시간 넘도록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무실에는 저녁을 먹고 돌아와 자리에 앉은 직원 몇 명이 남아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두 대의 모니터 중 한쪽에는 내가 가입한 보험의 보장 내역이 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AI가 정리해 준 비교표가 열려 있었다. 나는 약관과 AI의 답변을 번갈아 보며 마우스 휠을 천천히 굴렸다. 퇴직이 몇 해 앞으로 다가오면서 돈 걱정이 부쩍 늘었다. 퇴직할 때가 되면 군 복무 기간까지 보태 재직기간이 40년에 조금 못 미치니 공무원연금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예전 선배들이 받던 연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몇 차례 공무원연금법이 개정되면서 매달 내는 부담은 늘었고, 퇴직 뒤 받는 연금은 줄어드는 쪽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퇴직연금과 연금저축, 행정공제회에 얼마간 불입해 온 것도 있어 어느 정도 보탬은 될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병원비였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들어 둔 보험들이 그때에도 제 역할을 할지, 정작 필요한 순간에 빠진 곳이 드러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단골 이발소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발사의 전동 헤어클리퍼가 위이잉 소리를 내며 손님의 뒷머리를 지나갔고, 바닥에는 잘린 머리카락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대기 의자에 앉은 나는 벽면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낯익은 중견 배우가 나왔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다. “차 선생님, 제가 예언 하나 할까요?” 잠시 후 이어진 말은 이랬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가족에게 짐까지 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치매나 중풍이 아니더라도 병원에 누워 간병인 하나 써야 할 때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전화 한 통이면 간편하게 가입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화면 아래에 QR 코드가 떴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그쪽으로 가져갔다. 사전 예약이라고 했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월요일 아침에 전화가 왔다. 설계사의 목소리는 능숙했다. 그는 내가 기존에 가입해 둔 보험들을 하나씩 불러낸 뒤 조목조목 짚어 나갔다. 이 보험은 이래서 부족하고, 저 보험은 저래서 바꾸는 편이 낫다고 했다. 간병보험, 운전자보험, 암보험 세 가지를 자신들의 상품으로 갈아타라는 제안이었다. 설명을 듣는 동안에는 그 말이 그럴듯했다. 하지만 통화가 길어지고 있었고,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보험 얘기를 오래 붙들고 있기도 불편했다. 나는 좀 더 살펴보겠다고 말하고 제안서를 보내 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안서가 도착했고, 편한 시간에 연락을 달라는 문자가 뒤따라왔다.
제안서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보니 의심이 생겼다. 설명을 들을 때는 그렇게 분명해 보이던 내용이 혼자 보자니 어디가 유리하고 어디가 불리한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약관의 문장은 늘 그랬다.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몇 줄만 지나면 보장보다 조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때 생각난 것이 AI였다.
나와 AI의 인연은 20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원래 새로운 물건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궁금하다고 생각만 하다가 지나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직접 써 보았고, 기대와 다르면 금방 접기도 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얼리어답터에 가깝다.
그때 나는 구청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구청장에게 보고할 일이 많았고, 직원들이 만들어 온 초안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었다. 보고서의 방향을 잡거나 문장을 다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AI를 처음 써 보았다. 솔직히 처음 느낌은 실망에 가까웠다.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할루시네이션이었다.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그러다 2024년 장기 교육을 받으러 갔다. 교육과정에는 AI 활용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AI를 조금 더 진지하게 써 보기 시작했다. 1년 사이 성능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엉뚱한 답을 내놓는 일도 예전보다 줄어 있었다. 분임토론 결과물을 정리할 때, 개별과제 보고서의 초안을 잡을 때, 회의 안건을 다듬을 때마다 AI를 활용했다. 처음에는 보조 도구 정도로 여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먼저 짚어내는 일이 생겼다.
얼마 전에는 16개 구·군 보건소로부터 자료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 우리 시가 역점 추진 중인 퇴원환자 지속 관리 사업의 통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면 어떤 항목을 어떤 형식으로 제출받아야 하는지부터 정해야 했다. 나는 사업계획서를 AI에 넣고 물었다. 내가 구·군으로부터 어떤 자료를 어떤 형식으로 받아야 효과적인 통계 관리가 가능하겠느냐고 했다. 잠시 뒤 AI는 여러 시트로 구성된 엑셀 서식을 만들어 주었다. 각 시트에는 작성 지침까지 붙어 있었다. 담당 직원이 조금만 손봐 내려보내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내가 기대한 정도를 넘어서는 결과였다.
처음에는 유료 버전 하나만 구독했다. 그러다 쓰임새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하나가 둘이 되었고, 지금은 세 개를 쓰고 있다. 매달 10만 원 가까운 돈이 나가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업무 보고서를 다듬고, 통계 서식을 만들고, 수필 문장을 고쳐 보는 데까지 쓰고 있으니 내게는 꽤 쓸모 있는 지출이다.
사무실 점심자리에서도 요즘 AI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삼성전자 주가 얘기와 AI 얘기가 번갈아 오르내린다. 실무를 하는 직원들 중에도 아직 유료 버전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나처럼 유료 AI를 세 개씩 쓰는 직원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래서 AI 얘기가 나오면 대체로 내가 말을 주도하게 된다. 보고서 초안을 잡을 때 어떤 도움을 받는지, 엑셀 서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수필 문장을 다듬을 때는 또 어떻게 쓰는지 이런저런 경험을 꺼내 놓는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조금 크게 뜨거나, 정말 그렇게까지 되느냐고 되물으면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진다. 새로운 사용법을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즐겁고, 내가 먼저 써 본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은근히 뿌듯하다.
나는 설계사가 보낸 제안서와 기존에 가입해 둔 보험 약관을 함께 AI에 넣었다. 세 가지 보험을 하나씩 비교해 달라고 했다. 잠시 뒤 결과가 나왔다. 답은 간결했다. 지난달 새로 가입한 간병보험은 설계사가 제안한 상품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니 갈아타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운전자보험과 암보험은 달랐다. 오래전에 가입한 상품이라 지금은 팔지 않는 조건들이 붙어 있었고, 그 조건들이 오히려 내게 유리하게 남아 있었다. 설계사는 그 부분을 말하지 않았다. AI는 그 내용을 표로 나누어 짚어냈다.
화면에서 눈을 떼고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면서 혼잣말이 나왔다. “AI 아니었으면 그대로 가입할뻔 했네”
설계사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할 생각은 없다. 그는 자기 일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이 팔아야 할 상품의 장점을 중심으로 말했고, AI는 내가 놓치기 쉬운 불리한 점까지 함께 보여주었다. 사람과 기계의 차이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것은 설명의 방향이다. 같은 서류라도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히기 마련이다.
그날 이후 나는 보험 서류들을 다시 꺼내 보았다. 오래된 보험과 새로 든 보험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겹치는 보장은 없는지, 정작 필요한 부분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지금 가입해 둔 보험들도 AI에게 다시 한번 점검을 맡겨 보고, 내가 놓친 부분이 없는지 차분히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제는 이런 일도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직 낯설지만, 생각해 보면 나쁜 일은 아니다. AI는 자료를 정리해 주고, 내가 놓친 부분을 짚어 줄 수 있다. 다만 마지막 결정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어떤 보험을 남기고, 무엇을 줄이고, 어디에 돈을 더 쓸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한다.
퇴직 이후를 제대로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을 남의 설명에만 맡겨 두지 않는 것 부터 인지도 모른다. 보험 하나를 고르는 일도, 돈의 흐름을 다시 살피는 일도, 앞으로의 몸과 시간을 어떻게 지킬지 생각하는 일과 이어져 있다. AI는 그 과정에서 내가 놓친 부분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