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엔진은 언제 켜질까
박해영 작가의 전작을 워낙 인상 깊게 보았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하며 보고 있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드라마 제목은 대개 짧다. 최대한 압축하여 두 글자나 세 글자로 끝나는 제목도 많고, 길어도 일곱 글자나 여덟 글자 정도인데 이번 작품은 거의 한 문장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작가의 신작 소개 기사를 읽다가 제목에서부터 막혀 바로 본문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무가치함'이라는 말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제목을 두 번 읽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처럼 읽혔다. 33년을 헌신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남은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느낌. 겉으로는 괜찮은 척해도 속으로는 자주 비교하고 움츠러들고, 아무도 묻지 않은 변명을 혼자 준비하는 일. 제목이 길어서가 아니었다. 그 긴 제목 안에 사람들이 잘 말하지 않는 속마음이 너무 곧게 놓여 있었다.
드라마는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못 한 사내 황동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네 편의 시나리오를 썼지만 단 한 편도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잘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제자리인 그는 매 회마다 크고 작은 민낯을 드러낸다. 말투에는 자격지심이 묻어나고, 행동에는 뒤늦은 후회가 따라붙는다. 보기 편한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박해영 작가의 인물들은 대개 그렇다. 멋있게 포장되기 전에 먼저 들키고, 이해받기 전에 가장 볼품없는 자리를 먼저 드러낸다.
지난주 방송에서 황동만의 한 장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여주인공 변은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였다. 그 순간부터 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밥을 먹다가도 글이 써졌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글이 써졌다. 얼마나 몰입했던지 커피를 내려놓은 사실도 잊고, 커피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바로 옆에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그제야 발견했다. 황동만은 베토벤 이야기를 꺼냈다. 작곡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하인에게 우유를 데워 달라 시켰다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찬 우유를 가져왔다며 버럭 화를 냈다는 것이다. 데워진 우유는 이미 옆에 놓여 있었는데. 그 장면이 바로 지금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황동만은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베토벤같은 거장이 된것 같다고 하였다.
피식 웃다가 이내 웃음이 가셨다.
황동만의 엔진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쓰려 애쓴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가득 찬 상태에서 글이 그냥 흘러넘친 것이었다. 바카라상 앞에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안에서 무언가가 먼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밀에 따르면 엔진은 원래 우리 안에 다 있는 것이란다. 꺼져 있을 뿐이라 다시 켜기만 하면된단다.
나도 요즘 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 글감이 소진된 느낌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빈 화면을 열어놓고도 첫 문장을 시작하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억지로 쥐어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시작하지 못하니 더 막막해지는 날들이 이어진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도 손가락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모니터의 흰빛만 바카라상 위에 번지고, 식어가는 커피 냄새만 코끝에 남는다.
한동안은 오래된 기억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용호동 골목의 저녁 냄새, 방아잎 전을 부치던 어머니의 손, 한겨울 삯월세 단칸방 베니어 천장에서 맺혔다 떨어지던 물방울, 군 복무 시절 영내 매점에서 구워 먹던 날짜 지난 햄 같은 장면들을 건져 올리면 그래도 글이 되었다. 어린 날의 허기와 어머니의 손놀림과 골목의 냄새가 문장 사이로 들어왔다. 그러나 기억의 물도 끝없이 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바닥이 언제 드러날지 알지 못한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작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바카라상 앞에 앉아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쓴다고 했다. 영감이 차올라서가 아니라, 앉아 있으면 결국 무언가 나온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한다고 했다. 참 놀라운 일이다. 그 사람 안에는 아무리 퍼 올려도 줄지 않는 샘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매일 같은 시간에 앉는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의 엔진을 켜는 스위치인 것일까.
황동만에게는 변은아가 스위치였다. 베토벤에게는 악상이 먼저 찾아와 그의 손을 끌고 갔을 것이다. 매일 앉는 그 작가에게는 정해진 시간 자체가 스위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엔진의 스위치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 찾지 못했다. 꺼진 엔진은 멀리서 바라본다고 켜지지 않는다. 결국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내 속의 글쓰기 엔진은 언제쯤 켜질까. 어쩌면 오늘도 빈 화면 앞에서 오래 머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자리에 앉았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운전석을 비워 둘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