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찰나의 절정

사월의 낙화

by박계장

만개를 꿈꾸던 연분홍 꽃잎들이 야속한 봄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차가운 보도블록과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곤두박질쳤다. 한때 찬란한 화관(花冠)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오가는 차바퀴와 행인의 발밑에서 속수무바카라으로 짓이겨지고 있었다. 찰나는 그렇게 허망했고, 바닥에 눌어붙은 낙화(落花)에서는 비릿한 흙내인지 풋내인지 모를 것들이 배어 나왔다. 꽃잎을 짓누르는 그 빗줄기는 내 우산 위로도 사정없이 떨어졌고,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둔탁한 진동을 느끼며 나는 젖은 길을 한 걸음씩 밀어내며 걸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중, 그 꽃잎의 무덤을 가로지르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비에 젖어 살가죽에 착 달라붙은 검은 줄무늬가 붓으로 그어 내린 먹선처럼 짙고 완강했다. 녀석의 걸음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질척이는 꽃잎 잔해를 밟으면서도 발끝을 터는 법 없이, 제 속도 그대로 묵직하게 발을 딛고 나아갔다.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제 속도대로 비를 통과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생을 비에 젖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살아온 나의 가쁜 걸음들이 겹쳐 왔다.

나의 삶에는 어디 한 곳 마음 편히 기댈 언덕도, 비를 피할 넉넉한 처마도 없었다. 어린 부모의 단칸방에서 시작된 유년은 이삿짐을 쌀 때마다 동네만 바뀔 뿐, 늘 고만고만한 문지방 안쪽이었다. 가난은 피부에 닿기 전에 이미 삶의 배경으로 깔려 있어 굳이 불행인 줄도 모르고 자랐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복을 어색하게 걸치고 겉돌았고, 군대를 마치고 도망치듯 혹은 소나기를 피하듯 뛰어든 곳이 공직이었다. 그렇게 숨어든 처마 밑에서 어느덧 33년이 흘렀다.

비를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20년 전 시청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그해의 아침들도 늘 비를 맞는 기분이었다. 정시에 불이 꺼지는 안온한 저녁 식탁의 온기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는 자리였다. 알면서도 그곳으로 향했던 건, 대열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그 좁고 가파른 계단 위로 발을 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시청에서의 생활은 늘 한기가 돌았다. 아직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6시 남짓, 텅 빈 사무실에 들어와 컴퓨터 전원을 켜면 온기가 돌지 않는 모니터 위로 뽀얀 먼지가 일었다. 그때는 창밖 배산(盃山) 능선 위로 붉은 해가 솟구치는 걸 예사로 보았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들이 거대한 장벽처럼 앞을 가로막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풍경이다.

나는 아직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조간신문을 펼쳐 들고, 내 업무와 맞닿은 활자라도 눈에 띄는 날엔 숨을 죽인 채 변명과 대바카라을 엮은 보고서를 써 내려가야 했다. 상급자가 출근하기 전, 그의 텅 빈 바카라상 위에 그 서늘한 보고서를 반듯하게 올려두어야만 비로소 하루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기에. 나는 배산 위로 떠오르는 그 붉은 해를 등지고 앉아, 스스로를 그 가쁘고 팽팽한 시간 속으로 매일 아침 밀어 넣었다.

비를 피하려고 무작정 뛰다가 엉뚱한 처마 밑에서 숨을 헐떡이던 날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열면, 복도까지 새어 나오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도어록 해제 소리와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내가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아내와 아이들이 공유하던 세계의 문은 소리 없이 닫혔고, 공기는 정돈되지 않은 어색함으로 채워졌다. 내가 그 틈으로 발을 들이려 할 때마다 아이들은 뒷걸음질 치며 각자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젖은 외투를 벗지도 못한 채, 내가 지키려 했던 그 집에서 가장 낯선 이방인이 되어 서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고양이는 어느새 건너편 인도 위로 올라서 있었다. 축축한 연석을 디딘 네 발은 여전히 제 속도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도 길을 내주지 않는 곳에서 자기만의 호흡으로 찻길을 다 건넌 녀석은, 화단 속으로 꼬리를 감추며 사라졌다.

나는 묵묵히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지상의 빛이 멀어지는 틈 사이로 고개를 들자 바깥 풍경이 네모난 창틀처럼 잘려 보였다. 흐린 하늘, 차가운 화강석 바닥 위로 투닥, 투닥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등 뒤를 따라왔다. 녀석은 비를 맞으며 제 길을 걷고,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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