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

노년의 사랑은 생기의 바람이다

by이광주

늦바람은 산들바람이다.


사람들은 노년의 사랑을 두고 ‘늦바람 났다.’ 고한다. 그 말은 어쩐지 가볍다. 늦게 피어난 순수한 마음을 추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려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바람에도 저마다의 얼굴이 있다.


봄의 들녘을 헤집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숲을 뒤흔들고 바다를 성내게 하는 강풍도 있다. 거센 바람은 자신의 힘을 세상에 알리려는 듯 지나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긴다. 젊은 날의 사랑도 그와 닮았다. 뜨겁고 눈부시며, 한순간 세상을 모두 품을 것 같다가도 작은 이별 하나에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의 마음에도 계절을 만들어 준다.

여름 한낮, 오래 걸은 둘레길 끝에서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만났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말없이 식혀 주고,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에 서늘한 숨결 하나를 얹어 놓았다. 잠시 스쳐 갔을 뿐인데도 오래 기억에 남는 바람이었다.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노인은 내 옆에 앉아 있는 미니스커트 입은 젊은 여성의 늘씬한 다리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노인네 주바카라이네.’ 난 그 노인을 이해하려 했다. 노인에게는 삶에 생기가 아직 남아있다는 열정을 이해해 주고 싶었다. 주바카라없는 노인이라 손가락질당할지언정 아름다움을 느낄 삶의 생기가 남아있는 거라고….


노년의 사랑은 그런 생기의 바람이 아닐까.


늦바람은 서둘러 다가가지 않고, 붙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함께 걷는 걸음이 조금 느려도 기다릴 줄 알고, 침묵이 길어져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따뜻해진다. 말보다 눈빛이 먼저 닿고, 손끝의 온기가 긴 이야기를 대신한다.


젊은 날에는 사랑이 불꽃이었다.


강하게 타오르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고, 뜨거워야만 진실이라 믿었다. 그러나 세월을 지나고 보니 오래 남는 것은 불꽃이 아니라 온기였다. 누군가의 마음을 덥혀 주고, 지친 등을 말없이 기대게 하는 따뜻함이었다.

가을 산길의 억새는 바람이 불어야 더욱 아름답고, 늦게 핀 국화는 화려함 대신 깊은 향기로 머물게 한다. 인생도 그러하다. 서둘러 피어난 꽃보다 늦게 피어난 꽃이 더 오래 마음에 머무는 날이 있다. 그래서 나는 노년의 사랑을 늦바람이라고 부른다면, 그 바람은 결코 강풍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인생의 무더운 오후, 이마의 땀방울을 다정하게 식혀 주는 산들바람이다. 지나온 세월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남은 시간을 더욱 맑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바람이다.

그것은 세상을 흔드는 바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바람이다. 메마른 가슴을 적시는 이슬 같고, 해 질 녘 창가를 넘어오는 바람처럼 조용하고 깊게 스며든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남기지만, 마음에는 이해를 남긴다. 젊음은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나이 듦은 사랑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노년의 사랑은 늦게 찾아왔어도 결코 늦은 사랑이 아니다. 철 지난 국화꽃의 향기이며, 가장 잔잔한 시간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이다.

인생의 저녁 무렵, 누군가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오늘도 산들바람 하나가 조용히 지나간다.


그 바람은 이마의 땀방울을 식혀 주고, 오래 말라 있던 마음 한편에 작은 불씨 하나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일러 준다.


사랑은 일찍 와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찾아온 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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